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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그리고 군사력/조미대결

비밀문건해제 - 푸에블로호 납치사건(상)

조선일보 2014.1.24.금



[안치용의 시크릿 오브 코리아(Secret of Korea)]

푸에블로호 납치사건(상)

미국, 전투기 동원해 북한 공군기지 타격하려 했었다



[미국 비밀문서로 드러난 푸에블로호 피랍 전말]
북, 피랍 3일전부터 토끼몰이식 추적…가장 유리한 원산 공해서 나포

 

미군 전투기 일본서 오산에 급파…그러나 일몰전 원산 도착 불가능해 출격포기
존슨 대통령, "30분 거린데 왜 피랍 때 공군이 출격 못했나?"

 

전투기에 장착된 핵무기 폭탄을 일반 폭탄으로 교체하다 시간 지체
푸에블로호 무전보고도 1-2시간씩 지연 전달돼 혼선 빚고 초동대처 못해

 

푸에블로호에 비밀 장비와 문서 많아 공군기로 격침 계획
김성은 국방장관, '김신조 청와대 습격때는 가만 있더니'격노


▲ 1968년 북한에 의해 나포됐던 미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 북한은 현재 푸에블로호를 1866년 미국의 서먼호를 격침시킨 평양 대동강변으로 옮겨와 미국의 대북 침략행위에 대한 선전장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부터 46년전인 1968년 1월 23일 낮, 북한의 미그기와 초계정은 미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를 동해의 공해상에서 나포해 북한으로 끌고 갔습니다. 무장공비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를 습격하려고 시도한 것이 이틀전인 1월 21일.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미군 함정이 피랍되면서 한반도는 순식간에 전쟁공포에 휩싸였습니다.

당시 푸에블로호는 피랍 사흘 전부터 북한의 추적을 받고도 이를 눈치채지 못했고, 미군은 푸에블로호 피랍을 막기 위해 전투기를 출격시키려 했으나 일몰 전에는 현장에 도착할 수 없다는 판단을 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또 피랍 직전 선원들은 첩보장비와 비밀문서를 파기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으며, 피랍을 알리는 긴급무전보고는 몇시간씩 늦게 전달되는 등 혼선을 빚은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푸에블로호 피랍 당시의 이러한 긴박한 상황은 최근에 비밀해제된 미 백악관과 국무부, 국방부, CIA(미국 중앙정보국), NSA(미국 국가안보국), 연방의회 등의 비밀문서에서 나타납니다. 이 문서들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재구성해 보면 이렇습니다.


▲ 2012년 9월의 국가안보국 NSA의 푸에블로호 사건 보고서


푸에블로호 피랍사건은 1968년 1월 23일 낮 미국 해군과 NSA가 공동운용한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동해의 공해상에서 북한 미그기와 초계정에 의해 나포된 사건입니다. 푸에블로호는 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4년 미 육군이 건조, FP-344로 명명된 850톤급의 화물선 이었으나, 1966년 4월 미 해군에 인도된뒤 콜로라도주 푸에블로 카운티의 이름을 따서 푸에블로호로 명명됐고, 시애틀의 미해군 조선소에서 1년간의 개조작업을 거쳐1967년 5월 정보수집함으로 재탄생하게 됩니다


▲ 2012년 9월 비밀해제된 연방하원 군사위원회 푸에블로호사건 조사보고서


당시 이처럼 미해군과 NSA가 공동운용한 정보수집함은 배너호와 푸에블로호 2척이었고 1967년 11월 미 해군성은 1968년 1월부터 7월까지 7개월간 이 두 함정을 한달씩 번갈아 가며 북한 해안과 동해, 동중국해, 소련의 페트로파브로프스크 인근을 정찰하게 한다는 이른바 핑크루트 작전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이 핑크루트 작전 계획의 제1작전이 바로 푸에블로호의 북한해안 정찰작전으로, 1968년 1월 5일부터 2월 4일까지 한달간 푸에블로호로 하여금 공해상에서 북한해안을 정찰하고 지형지물을 파악하도록 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푸에블로호는 사실상 첫 출동에서 나포된 것입니다


▲ 2012년 9월 국가안보국 NSA의 푸에블로호사건 보고서


푸에블로호는 1월 4일 주일미해군사령관으로부터 북한 정찰을 위해 즉각 출항하라는 명령을 하달받았으며, 당시 작전명령은 푸에블로호가 감시당할 때, 즉 적에게 들켰을 때를 제외하고는 절대로 무선교신을 할 수 없고, 북한이나 소련 영토에서 최대 13해리(13 NM), 즉 가장 가까운 공해상까지만 접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푸에블로호는 1월 5일 일본 도쿄 인근 요코스카 해군기지를 출항, 큐슈의 사세보항에 정박했다가 한국시간 1월 11일 오전 6시(이하 한국시간) 사세보항을 출발, 대한해협(작전명령서에는 쓰시마 해협으로 표기됨)을 거쳐서 북진, 약 42시간만인 1월 12일 오후 11시 30분 작전구역에 도착했습니다.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감지된 것은 그로부터 8일뒤인 1월 20일이었습니다. 이날 일몰 직후인 오후 5시50분 4천야드, 즉 3.6킬로미터 전방에 북한 구축함 35호(SC-35)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북한 영토에서 15.4마일 떨어진 지점이었습니다. 피랍뒤 국방부 등에서 모든 상황을 종합한 뒤에야 이때가 바로 첫 위기였음을 알았으며, 당시 푸에블로호는 이를 전혀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바로 이날 푸에블로호의 존재를 확인하고 피랍에 가장 유리한 지점인 원산공해상에 진입할 때까지 조용히 뒤를 밟았습니다. 북한이 토끼몰이를 하듯 치밀한 작전에 나섰고 토끼를 때려잡는 지점은 원산공해상으로 정했던 것입니다.

드디어 푸에블로호는 1월 22일 아침 원산 인근 공해상에 도착했습니다. 북한이 정한 토끼사냥 지점에 도착하자 갑작스런 이변이 속출합니다. 북한이 사냥을 개시한 것입니다. 이날 낮 12시 25분 만야드, 즉 9킬로미터 전방에 북한 어선 2척이 나타나기 시작해 한척은 1.3킬로미터까지 접근했고 다른 한척은 90미터까지 붙었습니다. 특히 이날 오후 3시 다시 북한 어선이 나타나 30미터까지 접근하며 푸에블로호를 살폈습니다. 사실상 푸에블로호를 북한해역으로 몰아붙이려는 시도였습니다. 푸에블로호는 이날 오후 4시부터 1월 23일 오전 10시까지 정체불명어선들과 18차례나 마주쳤습니다. 그러나 푸에블로호는 안타깝게도 위험을 감지하지 못했습니다. 푸에블로호는 1월 11일 사세보항을 출항한 이래 1월 22일 오후 6시 25분 처음으로 시그널을 날렸습니다. 메세지없이 콜사인만 교환했다고 합니다.

1월 23일 오전 8시 30분과 오전 10시에 다시 위치만 보고한뒤 오전 10시 50분 첫 교신을 하게 됩니다. 교신내용은 백척간두의 위기상황과는 영 딴판이었습니다. ‘더 이상 감시받지 않음, 침묵유지로 변경’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선장 등은 간부식당에서 평화롭게 아침식사를 즐겼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때 오전 11시 35분 주위에 갑자기 배들이 많아진 것을 보고 비로소 위험상황 임을 알아차렸습니다. 국방부 비밀문서는 푸에블로호가 이때 처음 위험을 감지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감시받지 않는다고 자신있게 보고한지 채 1시간도 안된 때였습니다.

상황은 긴박하게 돌아갔습니다. 이로 부터 25분뒤인 23일 정오 북한 구축함 35호(SC-35)가 나타났습니다. 사흘전 조우했던 바로 그 북한 함정으로 북한이 서서히 토끼몰이를 하며 뒤쫓아 왔음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북한 구축함은 항복을 요구했고 푸에블로호는 우리는 공해상에 있다고 응답했습니다. 이 지점은 북한영토로부터 16마일 떨어진 지점으로 공해상이 명백했지만 북한은 미군기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자신의 앞마당이라고 판단하고 막무가내로 몰아부쳤습니다.

이때부터 대치가 계속됐지만 사실상 주도권은 이미 북한에 넘어갔습니다. 푸에블로호는 이날 낮 12시 52분 다시 무전을 통해 ‘가능한 한 현장에 체류하고 불가피할때 서서히 북동쪽으로 철수하겠다’고 보고했습니다. 이 또한 현실과 동떨어진 낙관적 보고였습니다. 그로 부터 23분뒤인 오후 1시 15분부터 18분 사이에 초계함 3척이 더 나타났고 마침내 미그기 2대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사실상 게임이 끝난 것입니다. 오후 1시 26분 북한은 발포를 하겠다고 말한뒤 총을 쏴댔고 1시 28분 푸에블로호에 강제로 승선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때 푸에블로호는 발포사실 등을 긴급보고하고 일부 무전기와 비밀문서 파기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파기라는 것이 도끼로 무전기와 첩보장비를 부수고 일부 비밀문서를 불태우는 수준이어서 비밀문서의 90%가 북한에 압수됐다는 것이 NSA의 분석입니다.

긴급보고를 받은 주일미해군사령부는 오후 1시 35분 미 5공군에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비밀문서를 살펴보면 그 지원은 한참 뒤에나 이뤄지며 푸에블로호는 손한번 못써보고 끌려가게 됐음을 알 수 있습니다


▲ 2012년 9월 비밀해제된 연방하원 군사위원회 푸에블로호사건 조사보고서



오후 1시 40분에서 50분 사이 다시 급박한 무전이 날라갑니다, ‘원산항으로 끌려가고 있다’는 보고였습니다. 오후 2시에도 보고가 이어졌습니다. ‘북한의 발포로 3명이 부상당했으며 그중 1명은 다리가 날라갔다. 무기는 한번도 사용해 보지 못했다’는 비참한 보고였습니다. 연방하원 비밀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푸에블로호의 무기는 캐리버 50이 2정, 톰슨 반자동소총이 10정, 45구경 권총 7정, 30구경 라이플 1정이 전부였습니다. 승무원이 83명인 반면, 총은 20정에 불과한 사실상 비무장상태였으며, 그나마 배 선체 하단에 보관돼 있어 응사가 불가능했습니다.

오후 2시 25분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에게 피랍사실이 보고됐고 정작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주한미군사령관은 2분 늦은 오후 2시27분에 이 사실을 알게 됩니다. 후일 밝혀지지만 푸에블로호의 보고는 유관부대에 한시간 내지 두시간씩 늦게 전달되기도 했습니다.
주일미해군사령부가 미 5공군에 지원요청을 한 것은 오후 1시 35분이었지만 5공군사령관이 태평양사령부에 전화를 하고 18전술비행단에 비상명령을 내린 것은 1시간도 더 지난 오후 2시 46분이었습니다. 곧이어 2분뒤인 오후 2시 48분 5공군사령관은 오키나와 카데나 공군기지에 대기중이던 전투기에 대해 오산으로 출격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출격은 즉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출격명령으로부터 1시간 23분이 지난 오후 4시 11분에야 전투기들은 오산으로 출격했고, 이때 이미 5공군사령관과 태평양공군사령관은 한발 늦은 출격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두 사령관은 ‘전투기가 해지기 전, 즉 일몰 전에 현장에 도착할 수 없으므로 푸에블로호를 지원할 수 있는 효과적인 작전은 불가능하다’고 인지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일몰 15분 뒤에 도착하게 되어 있었던 것이죠. 당시 전투기들은 출격명령을 받아도 즉각 출격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뒤에 설명하겠지만 당시 전투기에 장착된 무기가 문제였습니다.

전투기가 일본 카데나 공군기지에서 오산으로 출격한지 4분뒤인 오후 4시 15분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참모들과 푸에블로호 피랍상황과 언론발표계획 등을 논의했고, 10분뒤 오후 4시 25분 린든 존슨 대통령에게 피랍사실을 보고했습니다. 미국시간 새벽 2시 25분이었습니다. 35분뒤인 오후 5시 북한 함정에 끌려가던 푸에블로호는 마침내 원산항에 도착했습니다. 그로부터 36분뒤인 오후 5시 36분 사방천지는 어둠에 뒤뎦였습니다. 일몰, 해가 진 것입니다. 이때부터 미국정부도 깜깜한 암흑 속에 빠져버렸습니다.

미 국방부가 오산에 전투기를 출격시키는 등 응급조치를 한데 이어 미 국무부는 외교적인 해결방안을 찾았습니다. 데이비드 딘 러스크 국무장관은 이날 오후 5시 55분 소련 주재 미국대사에게 긴급전문을 보내 안드레이 그로미코 소련 외무부장관이나 접촉가능한 최고위층을 만나 미국선박이 공해상에서 북한에 납치됐음을 설명하고, 소련이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해 선박과 선원을 즉각 돌려보낼 것을 요구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소련은 미국의 이같은 제의에 대해 미국과 북한이 당사자간에 직접 해결할 문제라는 냉정한 입장을 전했습니다,


▲ 1068년 1월 23일 오후 11시 5분 본스틸 주한미군사령관이 태평양사령관에게 보낸 비밀전문. 1405Z는 ZULU TIME으로 그리니치 표준시를 의미하며 9시간을 더해야 한국시간임.


한편 한국 정부가 미국측으로부터 피랍사실을 공식통보받은 것은 푸에블로호가 원산항에 도착한지 1시간30분 뒤인 오후 6시30분이었습니다. 주한미군사령관이 태평양사령관에게 보고한 비밀전문에 따르면 본스틸 주한미군사령관은 상부의 승인을 받은뒤 김성은 국방장관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김장관은 격렬하게 항의했다고 돼 있습니다. 김 장관은 이틀전 발생한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 때는 미국이 판문점 군사정전위 소집만 요구하는 등 북한에 대해 미온적 대처를 하다가 푸에블로호가 납치되자 한국정부에 사전통보도 없이 F-105S를 오산기지로 출동시켰다며 노발대발했습니다. 김 장관은 지금 북한에 대해 보복공격을 하지 않는다면 북한은 또 다른 중대한 도발을 할 것이라며 강경입장을 전한뒤 아무 것도 미국측에 약속해 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아마도 미국이 북한의 청와대 습격을 강건너 불구경하듯 한다면 향후 한국의 대응자세 등에 대한 보장을 해줄 수 없다는 우리 정부의 입장을 말한 것으로 풀이됩니다.

사실 북한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기습에 대한 미국의 미온적 자세는 박정희 대통령과 미국과의 밀월관계가 끝나며 파열음을 내는 계기가 됩니다. 박 대통령은 이 사건으로 미국이 자국의 이익만 챙긴다는 확신을 갖게 됐고 결국 자주국방을 외치는 계기가 됐습니다. 또 이제부터는 미 행정부만 믿을 것이 아니라 입법부인 의회를 대상으로 적극적으로 한국의 입장을 설명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고 결국 코리아 게이트로 이어지게 됩니다. 푸에블로호 사건 브리핑을 받는 과정에서 김 장관의 격렬한 항의는 바로 박 대통령과 한국국민들의 미국에 대한 실망, 그리고 불신을 반영한 것입니다.

미국은 한때 북한공군기지 공격, 전투기를 동원한 푸에블로호 격침까지 고려했습니다. 린든 존슨 대통령 기념도서관에 보관중인 비밀문서에서도 미국이 북한 2개 목표물을 공격하거나 북한공군 무력화작전에 따른 미국의 손실을 분석하기도 했습니다. 또 CIA가 엄청난 위험을 무릅쓰고 정찰기를 출격시켜 북한전역, 특히 군사기지에 대한 정밀사진을 촬영한 것도 바로 북한공격을 염두에 둔 조치였습니다. CIA가 북한을 공습하는 등 군사행동을 취하기 전에 반드시 북한군 상태를 정밀확인해야 한다고 주장한 백악관 안보회의 회의록을 보더라도 미국이 북한 공격을 옵션 중 하나로 검토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트남과 한반도에서 2개의 전쟁을 동시에 수행하기 힘들다는 현실적 고민을 할 겨를도 없이 엎친데 덮친 격으로 불과 1주일뒤인 1월 30일 베트남에서 월맹군이 구정 대공세를 감행함으로서 북한공격은 무산됩니다. 그리고 사흘뒤인 2월 2일 미국정부는 북한과의 비밀협상에서 울며 겨자먹기로 북한영해침입을 시인, 사과하는 대신 승무원 송환에 합의하는 것입니다. 푸에블로호 피랍사건과 관련, 백악관, 국무부, 국방부, CIA, NSA 등 많은 부처에서 극비보고서를 작성했고 일부 문서는 오래전에 공개됐지만 일급 비밀들은 최근에야 공개되고 있고 아직도 일부는 그 내용이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미 연방하원 군사위원회 푸에블로호 특별조사위원회는 1969년 7월 26일 이 사건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를 작성했고 그 보고서는 43년만인 2012년 9월 14일에야 공개됐습니다. 또 NSA가 작성한 푸에블로호 종합보고서는 2006년 일부만 공개된뒤 역시 2012년 9월에야 전문이 공개됐습니다


▲ 2012년 9월 비밀해제된 연방하원 군사위원회 푸에블로호사건 조사보고서


이들 보고서에 따르면 푸에블로호가 1월 23일 12시 50분께 날린 무전교신은 주일미해군사령부에 23분뒤에, 태평양사령부 본부에는 2시간 10분 뒤에, 합참본부에는 2시간 34분 뒤에야 각각 전달됐습니다. 또 제 7함대에는 1시간 24분, 태평양사령부 함대와 엔터프라이즈 항공모함에는 1시간 40분 늦게 전달돼 피랍저지 작전이 제대로 수립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일본 카데나 공군기지에서 오산으로 긴급 출격했던 미공군 조종사는 인터넷에 게재한 기명수기를 통해 오산기지에 F4팬텀기 3대가 대기중이었으나 2대는 고장이 나서 부품을 기다리던 중이었고, 1대는 핵무기가 장착돼 있어 출격하지 못했기 때문에 카데나 기지에서 출동한 것이라고 회고했습니다. 이 조종사는 카데나 공군기지의 모든 F105S가 오산기지 이동명령을 받아 12대가 해질녁에 출격했으며, 당시 F105S는 모두 핵폭탄을 장착하고 있었으므로 이를 1대당 5백파운드 폭탄 16개로 교체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고 밝혔습니다. 이 조종사는 푸에블로호 격침 임무를 부여받고 대기했으나 푸에블로호 승무원 석방 때인 그해말까지 출격명령은 내려지지 않았다고 전했습니다. 린든 존슨 대통령은 백악관 안보회의에서 “우리 전투기가 푸에블로호에서 30분 떨어진 거리에 있었는데 도대체 뭐했느냐”고 묻기도 했습니다만 그 해답은 어렴풋이 짐작이 가능합니다. 결국 미국이 공해상에서 푸에블로호를 납치하는 북한의 불법행위를 멍하니 넋놓고 바라볼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이 전투기에 장착된 무기가 많은 이유중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 푸에블로호 부쳐 선장 미망인과 선원 등 5명이 연방법원에 북한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장을 북한정부에 송달했다는 DHL의 송달증명서.


▲ 북한 정부는 푸에블로호측 5명에게 6천5백여만달라를 배상해야 한다는 미국 연방법원의 2008년 12월 30일자 판결문.


그로부터 38년뒤 푸에블로호 부처 선장의 미망인과 선원 등 5명은 미국에서 북한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 승소하게 됩니다. 이들은 2006년 4월 24일 워싱턴DC 연방법원에 북한을 상대로 16억2천5백만달러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고, 놀랍게도 이 소송장은 같은해 9월 8일 오후 2시 3분 북한 정부에 송달됐고 DHL은 소송장 접수인의 서명까지 받아 법원에 제출했습니다. 연방법원은 2008년 12월 30일 북한의 잘못이 인정된다며 6천5백여만달러 배상판결을 내렸고, 부처 선장의 미망인들은 미국 재무부 외국자산통제국의 협조를 받아 2010년 2월 18일 시티뱅크 등이 보유하고 있는 북한자산 등 미국내 북한자산 3천4백여만달러를 압류했습니다. 이 소송장에는 북한이 부처 선장 등에게 남한간첩을 체포해 악랄하게 고문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스파이행위를 자백하라고 강요했다는 내용도 담고 있습니다.

☞ NSA 자료에 나오는 푸에블로호 관련 사진


▲ 푸에블로호 납치에 가담한 북한 초계정.


▲ 푸에블로호에 발포한 북한 구축함.


▲ 푸에블로호 통신실 내 첨단정찰장비.


▲ 푸에블로호 통신실


▲ 푸에블로호 통신실

 



▲ 푸에블로호 내 소각장비


▲ 푸에블로호 통신실 랙 배치도


 

  • 푸에블로호 상황보고서

린드 존슨 대통령 기념도서관이 공개한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시간대별 상황보고서

 

 

 

 

 

 

 

 

 

 

 

 

 

 

출처 -오늘, 아름다운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