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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그리고 군사력/조미대결

조선 대 미제 대결 1-2

EC-121 격추 사건(EC-121 shootdown incident)은 일본 아쓰기 해군 비행장을 출발한 미국 해군 소속 EC-121 워닝스타 조기경보기가 1969년 4월 15일 14시경 (한국시각) 동해상에서 조선인민군 공군 소속 미그 21 전투기의 공격을 받아 해상으로 추락한 사건이다. 탑승한 승무원 31명 전원이 사망했다. 영공 밖에 있었다는 미국의 주장과, 자국 영공을 침범한 후에 격추 당했다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장이 엇갈린다.[1] 출처- 위키백과

미공군 EC-121 정찰기
1969년 4월 16일자 워싱턴 포스트 기사

 

미해군 최악의 흑역사 '북한의 EC-121 정찰기 격추 사건'

2016‎년 ‎11‎월 ‎18‎일 ‎금요일, ‏‎오후 11:56:42 | 어메이징 코리아

미해군 최악의 흑역사 '북한의 EC-121 정찰기 격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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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4월 15일, 오후 미 해군 7함대 소속 비무장 정찰기가 동해 상공에서 북한 전투기에 피격...

승무원 31명 전원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일본 '아츠기'에 있는 해군 항공기지를 이륙한 미국의 EC-121정찰기는 동해를 통해 소련 극동 공군이 포진한 '블라디보스토크'를 정찰하고 이어 북한 쪽을 훑으며 남쪽으로 내려오곤 했다.

 

1969년 4월 15일, 이날도 어김없이 공중 정찰임무를 수행하고, 함경북도 무수단 근해의 목표 상공까지 배행 후 오산기지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이 정찰기에는 8명의 장교와 23명의 엔지니어가 탑승하고 있었고, 그 중 하나는 미국 해병대원이었다.

 

오후 2시, 청진 동남방 바다 위를 비행하던 'EC-121 정찰기'가 레이더에서 사라졌다는 보고가 미 해군기지에 들어온다.

 

 

그로부터 1시간 55분이 지난 시각, 평양방송은 "우리 영공을 침범한 미국 해군 소속 EC-121 정찰기가 북한군 MiG-21전투기에 격추되었다."고 발표한다.

 

"푸에블로호 사건 이후 자신감을 가진 북한군은 좀더 큰 도발을 감행하기로 하고, 정기적으로 북한 영공에 접근해 정보를 수집해가는 미 해군 정찰기 EC-121을 격추한다는 치밀한 계획하에 이루어진 명백한 북한의 도발행위였다."

 

 

이로인해 탑승자 31명 전원이 사망하는데...

 

 

사건 발생 직후, 미 국방부는 소련, 중국, 쿠바 등지에서의 정찰비행을 일시적으로 중단시켰다.

아울러 두 개의 항공모함 선단을 동해에 출동 시키고, F-4 전폭기들을 남한에 긴급 배치, 원산 앞바다에서 무력시위를 벌였고, 공산측의 요청으로 290차 군사정전위가 긴박하고, 살벌한 분위기속에서 열렸으나, 미국의 응징조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닉슨 행정부는 전술 핵무기를 사용한 보복 공격을 검토했으나, 실행되지는 않았다.

 

 

1년 전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피랍됐을 당시 닉슨은 미온적인 대응을 한 존슨 대통령을 비난한 바 있었는데 자신이 대통령에 취임하고 나자마자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정찰기 격추사건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이 대통령이 된 상황에서 무력시위 외에는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대치속에 넉달이 흘렀고, 8월 17일 또 한번의 북한의 도발이 감행된다.

 

 

한강 하구의 군사분계선 부근에서 북한군이 미군 헬리콥터(OH-23)를 격추한 것이다. 거기에 타고 있던 미군 병사 세 사람은 중상을 입고 포로가 되었다.

 

1969년 12월 3일, 미국은 북한이 요구하는 대로 사과문에 서명을 하고 나서야 미군 병사를 데려갈 수 있었다. 이로써 EC-121 격추 사건은 북한의 승리로 일단락 되었다.

 

 

냉전시대, 세계 최강임을 자부하던 미국에게는 치명적인 오점으로 남게된 사건이었다.

 

 

미국이 북의 EC-121 격추사건 조용히 덮은 이유

출처 - 자주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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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관계를 연구해오면 늘 궁금했던 일 중에 하나가 EC-121기 격추사건이었다.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이 발생한지 1년여만에 다시 터진 이 사건은 의외로 조용히 끝나버렸기 때문이다.

 

실제 당시 닉슨 대통령은 1년 전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 때 존슨 대통령이 대북 압박을 강하게 하지 못했다고 맹비난한 바 있었는데 정작 자신은 더 조용히 이 사건을 덮어버린 것이다.

 

물론 처음엔 항공모함 4척을 포함한 40여척의 함선을 동해에 전개하여 북을 압박하는 등 대규모 군사적 압박을 가하기는 했지만 의외로 일찍 북으로부터 아무런 사죄나 배상을 받아내지 못하고 사건을 덮고 말았다.

 

이에 대해 키신저는 회고록에서 첫째, 중국과의 관계개선 추구했던 점, 둘째, 닉슨 행정부가 출범 3개월이 채 되지 않은 상황에서의 미숙함, 셋째, 베트남전쟁 때문에 군사력 이동이 쉽지 않았다는 점을 그 이유로 들었다.

 

이런 상황이 일정한 영향을 미쳤을 수는 있겠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될 수 없다. 

중국과 외교관계를 위해 자국 병사가 북에 의해 대량 희생된 사건을 덮을 미국이 아니다. 또 푸에블로호 사건 때에도 마찬가지로 본격적으로 미-중관계 개선에 들어간 상황도 아니었다.

정부 출범 3개월이면 모든 진용이 갖춰진다. 특히 미국 국방부는 정권 교체와 큰 상관없이 언제든 보복타격을 준비하고 있다. 군사력 이동도 이미 항공모함을 4척 포함 40여척 푸에블로호 사건 못지 않게 많이 한반도로 이동시킨 상황이었다. 명령만 내리면 보복공격을 얼마든지 수행할 수 있는 전력이다.

 

특히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 당시엔 미군이 1명밖에 희생되지 않았지만 전쟁 일촉즉발 상황이 1년여 간 계속되었다. EC-121기 사건은 미군 31명 전원이 사망한 충격적 사건이다. 그런데 미국은 푸에블로호 때보다도 훨씬 조용히 끝내버렸다.

 

그 내막이 최근 인터넷을 통해 공개되었다. 김일성 주석이 제안한 질문 하나에 미국의 협상팀을 할 말을 잃고 조용히 철수했다는 것이다. 다음은 관련 내용이다. 북이 직접 공개한 것은 아니고 이런 연구를 직업적으로 하는 한 해외교포가 입수한 자료를 바탕으로 한 주장이기는 하지만 내용을 자세히 분석한 결과 상당히 일리가 있다고 판단하여 소개한다. 

 

 

[1969년 4월 조선에서 "EC-121"사건이 터진 후 이것을 토의하기 위해 판문점에서 군사정전위원회가 열렸다. 그 회의에서 첫 발언은 관례에 따라 인민군 측에서 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인민군측 수석대표의 첫 발언이 상상을 뒤집었다.

 

"귀측에 한가지 묻겠다. 'EC-121'의 소속이 어데인지 밝히라."

 

순간 온 세계가 얼어 붙었다. 당장 큰 일을 칠 것처럼 등등하던 미국측 수석대표는 단번에 기가 죽어 머리를 싸쥐고 진땀만 흘리며 끝내 아무 말도 못 하다가 회의중지를 제기하고는 인민군측에서 동의하기도 전에 급히 달아 났다.

 

이것으로서 "EC-121"사건은 마무리되었다.

 

이 사건과 관련하어 조선에서 펴낸 책들을 보면 1969년 4월 16일 김일성 수상이 예정대로 농촌지역에 대한 지도에 나갔다고 되어 있다. 여기에 알려 지지 않은 한가지 일화가 있다.

 

그 전날 김일성 수상은 "EC-121"사건과 관련한 보고를 받았지만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인민군 총참모부 지휘관들과 군사정전위원회 인민군측 대표들은 벙벙했지만 도저히 김일성 수상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이 밤새껏 머리를 맞대고 토의했지만 아무런 결론을 도출하지 못했다. 그 의문은 다음 날 아침에야 풀렸다.

 

김일성 수상이 예정대로 농촌지도에 나가기 전에 다시 그들을 불렀는데 그들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그러는 그들을 추궁할 대신 김일성 수상은 그럴 줄 알았다,  아무래도 내가 수를 대 주어야 할 것 같다, 이제 판문점에 나가 "EC-121"의 소속이 어디냐고 묻고 돌아 오라 라고 말 하고는 여유있게 떠났다.

 

김일성 수상의 말을 들은 인민군 지휘관들은 처음에는 어리둥절 했으나 인차 그 의도를 간파하고 모두 만세를 불렀다.

 

그것은 "EC-121"이 미 해군 태평양함대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전협정은 유엔군 사령부 즉 미 8군 사령부와 체결했으므로 군사정전위원회에서 토의하는 모든 문제는 오직 미 육군의 미 8군 사령부 관할 범위이다.

 

만일 "EC-121"이 미 해군 태평양함대 소속임을 사실대로 공식 인정한다면 유엔군 사령부의 관할범위가 아니므로 월권행위가 되고 만다. 정 이 문제를 토의해야 한다면 미 국방성과 국회의 동의를 받아 유엔군 사령부와는 관계없이 미 태평양함대 사령부가 인민군 총참모부와 직접 교섭하어야 하며 그것도 군사정전위원회에서 토의할 문제는 아니다.

 

일단 미국에서 큰 소리를 냈으니 벽도 문이라는 식으로 강짜로 "EC-121"이 미 8군 사령부 소속이라고 하면 너무도 어이없는 거짓말에 전 세계가 웃을 것이다. 즉 미국이 제기하는 주장의 허위성이 단번에 드러 난다.

 

그야말로 미국으로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예리한 질문이다. 그 질문에 사실대로 인정하면 월권행위가 되고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면 모든 것이 허위로 되니 미국측 수석대표가 무엇이라고 대답하겠는가?

 

이 회의과정을 보고 받은 미 국방성과 국회에서도 모두 너무도 기가 막혀 아무 말을 못 했다. 군사적으로 때리자니 조선의 정치군사력이 간단치 않고 외교적으로 억누르자니 상상외로 노련한 조선의 외교술에 도저히 아무런 대책을 세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할수 없이 미국은 조선측에 추락된 "EC-121"의 잔해와 승무원들의 시체를 건지도록 승인 해 달라고 비밀교섭한 후 겨우 승인을 받아 바삐 대충 건져 가지고 달아났다.]

 

인터넷에 소개되어 보았던 관련 북의 영화에서는 인민군 해병들이 EC-121기 바닷속 잔해를 미군보다 먼저 확보하기 위해 격투를 벌린다는 내용이 있었다. 미군은 공해상으로 끌어다가 북이 영해 밖에서 격침시켰다고 주장하며 북을 공격하기 위한 명분을 마련하려고 했는데 그것을 미리 차단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런데 이번 자료를 보니 실제로는 비밀 협상을 통해 미군들이 건져가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북이 확보했다면 푸에블로호처럼 전리품으로 자랑했을 텐데 EC121기 잔해는 북이 공개한 적이 없다.

 

미국은 상대가 아무리 예리한 근거를 가지고 외교협상탁에서 정당한 주장을 해도 힘으로 밀어붙이는 나라이다. 베트남 전쟁도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전쟁명분을 만들어 공격을 시작했고 이라크 전쟁도 없는 대량살상무기가 있다고 우겨 공격을 시작했다.

 

EC-121기 격추사건을 당한 후 항공모함을 4척이나 끌고 와서도 북을 공격하지 못한 것은 결국 전쟁이 터졌을 때 미국에게도 막대한 피해가 예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다가 외교전으로 압박을 가해 북을 못살게 굴 수는 있었는데 김일성 주석의 예리한 공격에 외교전마저 엄두를 내지 못하고 시신 수습에 만족하고 사건을 마무리지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북은 이제 수소탄과 대륙간탄도미사일까지 보유하였다. 미국은 여전히 군사공격도 하나의 방법으로 남겨두고 있다고 강조하고 있는 상황이기는 하지만 사실 대북 군사적 공격은 더욱 더 힘들어졌다. 

그러면 남은 방법은 협상탁에 앉아서 벌이는 외교전인데 북의 외교전 실력 또한 만만치 않은 것 같다.

김정은 위원장이 미국을 상대로 어떤 외교전을 펼지 미국의 트럼프는 또 어떤 외교전으로 북을 굴복시키려할 것인지 귀추가 주목된다.

 

어쨌든 미국은 북의 완전한 핵과 대륙간탄도미사일 보유는 절대로 용납하려 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미국 본토를 일거에 잿더미로 만들 수 있는 무서운 무기를 북이 보유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북인식 변화

푸에블로호 사건에 대한 존슨 행정부의 초기 인식은 냉전적 사고에 지배를 받고 있었다. 미국은 푸에블로호 사건 이전부터 갖고 있었던 대북인식에 기초하여 푸에블로호 사건의 배경을 소련과 북한의 공모,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의 관심을 돌리기 위한 시도 등으로 해석하고 있었다. 이러한 해석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베트남 전쟁을 수행하는 상황에서 한반도에 제2의 전쟁을 수행할 수는 없었다. 이 시기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은 베트남 전쟁과같은 글로벌 전략의 일부였기 때문에 푸에블로호 사건도 전략적 수준의 선후관계 속에서 전개되었다. 이러한 구조적 틀 속에서 북미협상에 임했던 미국은 동맹국인 한국을 안심시키는 동시에 나포된 승무원을 송환해야 하는 두 가지 목표가 서로 충돌하는 딜레마에 빠졌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북한의 의도대로 북미 간 직접협상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북한은 나포 당시에는 군사적 충돌까지 감수했으며 군사정전위원회 비공개 협상에서 강경한 자세를 고수했다. 북미협상을 통해 북한은 국가간의 관계를 부각시키고 국내정치적으로 주체사상의 성과를 선전했다. 무엇보다 미국과 협상을 지속하면서 미 국무부의 직접 개입으로 전개된 협상자체가 북한의 국가적 위상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럼에도 미국은 협상 주도권을 북한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미국의 협상력(negotiation power)이 제한된 이유는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서 협상을 진행하기 어렵다는 인식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이를 한국과 미국 국내에 공개할 수 없었던 현실 때문이었다. 그 결과 미국은 박정희 정부의 방기 우려, 북한의 강경한 자세 그리고 미국의 연루 우려라는 3중 제약 속에서 전례 없는 기묘한 타협을 이끌어냈다. 나아가 밴스 특사의 방한 이후 존슨 행정부 내에서 북한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는 점은 미국의 대북인식 변화를 보여주는 또 다른 근거였다.

출처::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