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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그리고 군사력/조미대결

조선 대 미제 대결 1-3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1. 개요

1976년 8월 18일 판문점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북한의 무력 도발이 충돌한 끝에 남북한의 준전시 상태, 즉 전쟁 터지기 일보 직전까지 이르렀던 사건이다. 북한이 남한에게 저지른 도발이야 많지만, 이 사건의 경우에는 주한 UN 장교를 살해한 대단히 심각한 사건이다. 그래서 중국과 소련도 감히 북한을 두둔하지 않았다.[4]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려 했던 김신조 사건에서도 올라가지 않았던 데프콘이 3단계로 격상되어 전시 직전의 일촉즉발 상황까지 갔었다.

2. 사건 경위

당시 판문점은 물리적인 군사분계선이 존재하지 않는 단어 그대로의 공동경비구역이었는데, 유엔군 측 3초소(CP 3)는 조선인민군 육군 초소 3개소(KPA 4, KPA 5, KPA 8)에 포위당한 지점에서 항상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래서 가장 고지대에 위치한 5초소(OP 5) 측에서 3초소를 지켜보고 있어야 했는데, 이 문제의 미루나무가 5초소의 시야를 방해하고 있었다. 8월 3일 주한UN군[5] 경비대 작업반은 3초소의 안전 도모를 위해 미루나무를 자를 것을 권고했다.

이에 8월 6일, 한국군 노무자 4명과 UN군 4명이 미루나무 절단을 시도했는데 이때 북한군이 이의제기를 하면서 작업을 중단시켰다. 그러자 경비대는 8월 18일 절단이 아닌 가지치기만 하기로 결정하고, 오전 10시 30분 노무자 3명, 육군 장교 3명, 경비병 7명을 동원하여 가지치기 작업에 들어갔다.

이때 북한 육군 군관 2명과 하전사 8명이 나타나서 다시 항의를 했다. 이에 UN군은 가지치기 작업을 하는 중이라 설명했고, 이때 현장에 있던 북한군도 수긍하여 가지치기를 하는 노무자들에게 가지를 잘 치는 법에 대해 조언을 하는 등[6], 작업은 매우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3. 발단

그런데 10시 47분에서 50분 사이, 갑자기 북한 육군의 박철 중위[7]가 병력을 이끌고 현장에 나타나며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박철 중위는 느닷없이 경비 중대장 아서 보니파스(Arthur G. Bonifas) 미 육군 보병대위에게 큰일 나기 싫으면 작업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당연히 보니파스 대위는 이를 무시하고는 작업을 속행하도록 지시했고, 11시 30분에는 북한군 경비병의 숫자가 30명으로 크게 증강되었다. 박철 중위는 "그만두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2차 위협을 가했으나 보니파스 대위는 재차 이를 무시했다.

그러자 박철 중위가 소매를 걷고 차고있던 손목시계를 호주머니에 넣으며 부하들에게 신호를 보내자 북한 육군 경비병들은 일제히 소매를 걷었고, 박철 중위는 즉각 "죽여!" 라고 소리 지르며 보니파스 대위를 걷어차며 구타했다.

다른 북한군들은 주먹과 곤봉을 이용해 UN군 장병들을 상대로 마구잡이식 폭행을 가했으며, 북한군 병사가 버려진 도끼로 보니파스 대위의 머리를 찍어서 살해했다. 여러 병사들이 부상을 입었으며, 보니파스 대위뿐만 아니라 소대장 마크 배럿(Mark T. Barret) 미 육군 보병중위 역시 참혹하게 살해당했다.[8] 북한군 자신들도 만행을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았던지 일을 저지른 직후 제대로 식겁한 채 36계 줄행랑을 쳤다고 한다.

 

 

아서 조지 보니파스 소령(Arthur George Bonifas 1943년 4월 22일생, 추서 계급), 마크 톰 배럿 대위(Mark Thomas Barret 1951년 6월 9일생, 추서 계급)

박병엽 전 조선로동당 고위 간부[9]의 증언록에 의하면, 당시 북한 국가주석 김일성이 아닌 김정일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었다고 한다. 당시 북한은 김정일이 후계체제를 구축해나가는 과정이었고, 김정일이 전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있었다. 김정일은 당시 미루나무 가지치기를 한다는 보고를 받고 "조선 사람의 본때를 보여주라. 단, 남조선 노무자들은 건드리거나 총을 쓰지 말고 미제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줘라."라고 지시했다.

 

4. 북한의 주장

협정을 대놓고 무시하면서 백주대낮에 미군 장교를 참혹하게 살해한 만행을 벌이고도 북한 측의 반응은 뻔뻔하기 그지 없었다. 미군 측이 나무를 자르는 것을 보고 경비병들이 제지하러 나섰는데, 갑자기 미군이 도끼를 던졌으며, 북한 측 하전사들이 날아오는 도끼를 손으로 잡아 되던졌다는 억지 주장을 늘어놓으면서 경비장교 회의를 열자며 사건을 대충 경비장교 회의 선에서 덮으려 들었다. 나중에는 한국과 미국측에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기까지 했다.

 

5. 사건 이후의 전개

5.1 본격적인 준전시 태세

말 그대로 국제적 대도발 사태였다. 이유가 있더라도 사병을 잃은 것에 분노할 상대가 미국이었다. 장교 2명을 어이없는 이유로 참혹하게 잃은 미군은 격노했다. 당시 UN군 사령관 미 육군대장 리처드 스틸웰 장군은 휴가차 일본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사건 보고를 받자마자 여객기도 아니고 수송기도 아닌, 무려 전투기 후방석에 탑승해 급히 복귀했다. 복귀한 스틸웰 대장은 즉시 회의를 소집한 뒤,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데프콘 3[10]를 발동시키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건을 보고받은 미국 정부도 강경하게 대처하기로 했다. 당시 미국 정계에는 당파를 불문하고 더 이상 아시아의 공산주의자들에게 미국의 위신이 깎여서는 안 된다는 확고한 인식이 있었다.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이전까지 전쟁에서 절대 패하지 않는다는 미군의 자존심이 바닥을 기고 있던 상황이었다. 또한 대통령 경선을 준비하고 있던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은 가뜩이나 공산주의자들에게 약하게 보인다는 비판을 받고 있었기에, 이런 비판을 불식시킬 필요가 있었다.

포드 대통령은 즉각 북한을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미국 시간으로 8월 18일 오후 3시,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의 주재로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의 대리인 국방차관 윌리엄 클레멘츠, 합참의장 미 해군대장 제임스 핼러웨이 제독, 대통령 안보 부보좌관 윌리엄 하이랜드 등이 참여한 워싱턴 특별대책단 회의가 소집되었다. 회의에서 키신저 장관은 현장 사진을 보고 극도로 분노했고 사진에서 북한군 시체가 보이지 않는다며, 북한군을 권총으로 쏴죽였어야 했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CIA에서는 이 도발이 계획된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했고 이에 참석자들도 동의했다. 키신저는 북한이 미국인 2명을 때려죽인 대가를 반드시 치러야 할 것이라고 소리쳤고 회의장을 나오면서 빨갱이들의 피를 반드시 보고야 말겠다고 말하는 등 미국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그렇지만 판문점에서 일어난 사건만으로는 전면전을 일으킬 수는 없었고 특히 중국과 소련을 자극할 우려도 있어 스틸웰 장군은 우선 사건의 원인이 된 미루나무를 자르고, 이에 북한측이 추가 도발을 가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대한 분위기를 조성하자는 대안을 제시했다. 결국 대안이 승인되고 데프콘 등급이 상향되었다. 회의를 마친 키신저 장관은 중국을 통해 북한 측에 조용히 있지 않으면 '중대한 결과'가 초래될 것이란 경고를 보냈다.

8월 19일에 들어 미국은 군사정전위원회 개최를 요구했으나 북한측은 여전히 경비장교 회의를 운운하며 사건을 덮으려 했다. 결국 군사정전위원회와 경비장교회의가 동시에 열렸다. 이 자리에서 UN군은 김일성에게 보내는 UN군사령관의 메시지를 통해 군사 정전 위원회 본회의에 당장 나오라는 강경한 최후통보와 사과 및 배상을 요구했으나, 북한은 여전히 억지주장을 계속하며 되려 사건 가담 주모자들을 처벌하라는 뻔뻔하기 그지없는 태도를 유지했다. 당연히 협상은 결렬되었고, 스틸웰 장군은 그날 바로 워싱턴 국가안보회의에 데프콘 3를 발동하겠다고 보고했고 마침내 데프콘 3이 발령되었다. 이로 인해 6.25 전쟁 이후 최초로 주한UN군과 대한민국 국군이 준전시체제에 돌입했으며 북한군도 이에 맞서 북풍 1호(준전시체제)를 발동, 전군 완전무장을 지시했다.

 

 

5.2 폴 버니언 작전의 수립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직후 미국 북한에 대한 보복 작전이다.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으로 남북한 양군이 대치하는 가운데 폴 버니언[1] 작전(Operation Paul Bunyan)이 세워졌다. 지원병력 감시 하에 미루나무를 벌목한다는 작전이었다. 1976년 8월 21일, 마침내 미국 본토와 대한민국의 주변국에 주둔한 미군 기지에서 병력을 편성했는데, 단순히 벌목을 위한 병력이라고 보기에는 힘든 규모였다.


이런 어마어마한 규모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북한에 대한 전면적 공격보다는 휴전선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서해안 부분 정리, 개성 및 연백평야로의 진격, 옛 38선 이남 대한민국 영토의 수복 등을 고려한 병력이었다. 공산권 측에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 북한이 추가 도발 없이 침묵한다면 무력시위로 끝낼 계획이었지만, 유사시에 북한이 추가 도발을 하면 바로 반격할 생각이었다. 일단 미군의 계획은 작전시 교전 사태가 발생하면 포병 부대는 개성의 인민군 육군 막사에 포격을 개시, 개성 위쪽 시변까지 포격해서 인민군 육군 포병 전력을 싸그리 없앤다는 것이었으며, 북한 육군 전차 부대의 남하와 같은 구체적인 전시상황 계획까지 완벽하게 수립했다.

 

5.2.1 폴 버니언 작전의 전개

미 해군은 동아시아를 작전지역으로 삼고 있는 7함대를 총동원하고, 미 공군 역시 한국과 일본 주둔병력 외에도 한반도를 작전지역으로 삼고 있는 괌의 폭격기[3]를 동원했으며, 미 육군도 1만2000명의 증파요청을 감안하면 최소 사단 단위의 병력의 증파를 계획하는 등 여러모로 미국도 당시 한반도에 동원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병력을 동원했다.

 

이 작전이 시행되기 전 군사분계선 부근에 데프콘 2[4]가 발령되었다.

육군 항공대 AH-1 공격헬기 7대와 다목적 헬리콥터 20대의 직접 엄호 및 도끼와 권총으로 무장한채 30여명으로 이루어진 미군 공동경비부대들이 돌아오지 않는 다리 같은 판문점 주변의 주요 시설들을 안전하게 확보했고 미 육군 공병 8명으로 이루어진 2개 팀이 전기톱으로 미루나무를 자르는 데 성공했다. 북한이 침묵했기 때문에 보복은 하지 않기로 결정하여 작전은 그대로 종결되었다.

그런데 특전사 결사대원들은 카투사로 위장, 권총과 수류탄은 전투복 속에 숨기고, 크레모아, M79 유탄발사기 등은 삽, 곡괭이 등 작업도구 밑에 감추는 식으로 트럭에 탑승하여 공동경비구역에 들어가 도끼와 몽둥이를 가지고 북한군 초소 4개를 파괴하였다.[5] 대원들이 초소에 접근해 손에 도끼와 소총을 들고 활보하며[6] 초소를 난장판으로 만들자, 북한군은 모조리 도망쳤다. 간간이 나타난 북한군은 독이 오른 특전사 대원들이[7] 위협을 하며 욕을 퍼붓자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당시 매복작전을 수행 중이던 1사단 수색대원은 훗날 인터뷰에서 이러다 정말 일이 나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살벌한 분위기였다고 한다.

미국은 어디까지나 나무를 벌목하기만 하고 북한의 반응을 볼 계획이었기에 실제 전쟁을 수행할 전력을 동원했어도 무력 시위에만 그쳤고 그렇다보니 한국 육군 특전사 대원들이 북한 초소를 공격하자 대경실색했다. 미루나무를 자른 후에 특전사 대원들이 북한군에 욕설을 퍼붓고 인민군의 초소로 달려나가자 엄청 당황했다고 한다.[8] 미군이 전쟁 발발을 우려해 결사대를 제지하자, 특전사 대원들은 북측 도로 차단기를 제거하기 위한 진격에 불응하는 미 육군 트럭 운전병 권총으로 위협하기도 했다.[9]

특전사 결사대는 북한군이 특전사의 공격에 대해 무력대응을 할 경우엔 북한군들을 과감히 사살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다만 먼저 북한군을 사살하지는 마라는 명령이 내려져 있었다. 즉, 북한군을 구타하고 깽판을 놓다가 북한군이 발포하면 바로 응사해서 사살하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북한군에게 선제공격을 당하는 대원들은 전사하게 될 것이므로 그야말로 죽음을 각오한 결사조로서의 투입인 것이다. 실제로 출동 직전에 유서와 손톱 등을 남겼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북한군이 처음부터 저항 없이 무조건 도망가기만 해서 교전은 발생하지 않았다.

실제로 작전에 투입된 1공수 대원 증언에 따르면, 유서작성, 손톱과 머리카락을 잘라서 남겼고, 출동전까지 외출 외박이 금지된 채 영내 대기를 하였다. 초소를 부술 때 북한군 초소 병력들은 도주를 했지만, 곧이어 소총으로 무장한 병력들이 분계선을 따라 도열하여 대치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발포 등의 공격은 없었고 모든 초소를 파괴하는 걸 구경만 하였다. 특전사 대원의 증언에 따르면 무표정한 북한군 무장 군인들의 표정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고 한다. 초소를 파괴하는 동안 나머지 특전사 대원들도 소총으로 무장하고 북한군 출동 병력과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10]

 

[1] 북미의 벌목꾼들 사이에 전해지는 설화에 등장하는 거인 나무꾼이다.

[2] 당시 제7함대는 제2차 세계 대전, 특히 태평양 전쟁기의 제7함대(당시는 제7함대라는 이름 대신 태평양 함대로 불렸고 그 산하에 제7함대가 번호함대로 편성되는 형태였다.)와 달리 미국에서 약체라고 불릴 정도였지만 그 약체인 7함대조차 소련 중국이 쩔쩔 맬 정도였다. 이 당시나 지금이나 7함대를 총동원하면 어지간한 국가 하나는 단독으로 갈아버릴 수 있을 수준이다.

[3] 전술 폭격기 F-111 및 전략 폭격기 B-52[4] 기지방호 용어로는 Fast Pace(천막을 도는 속도를 높임)라 불린다. 부대편제인원이 100% 충원되며 실탄이 지급된다. 데프콘 2가 발령된 것은 이 때가 처음이고, 1994년에 김일성 사망으로 1회 추가 발령된 이후 현재까지 발령이 되지 않고 있다.

[5] 참고로 M16 소총은 샌드백에 넣어 가져갔는데, 미군이 물어보면 방호벽으로 둘러댔다.

[6] 당시 특전사 지휘관의 인터뷰에 의하면, 박 대통령은 북한군이 30m만 접근해도 발포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정병주 특전사령관이 30m를 100m로 고쳤다고 한다.

[7] 초소를 난장판으로 만들 때, 초소 안의 김일성 초상화를 깨부수고 커튼 등을 약탈했으며, 북쪽을 향해 오줌발까지 갈겼다고 한다.

[8] 한편 이 사건 전까지 박정희 정권과 미국의 사이가 소원해져 주한미군 축소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에, 국지전을 발발시켜 주한미군을 붙들어놓기 위해 박정희 정권이 결사대 작전을 지시했다는 분석도 있다. 더불어 베트남 전쟁 이후 전반적인 반전 움직임과 더불어 미국이 묵인했던 독재 세력들을 차근차근 정리해나가는 시기이도 했기에 이는 박정희에게는 충분한 위협으로 받아들여져 무리수를 두었다는 평도 존재한다.

[9] 이 일로 김종헌 소령은 군법회의에 회부되었으나 흐지부지되며 무죄 판결을 받았다.

[10] 1공수 백모씨의 증언. 1987년 청취.

 

 

 

출처 - 나무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