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인류사 첫 ‘초거대 한민족 피라미드’ 400여개 은닉
이을형의 ‘법과 정의’…한국의 상고사 찾기(18)-신시배달국사(神市倍達國史)(10)
▲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들어가며
그 제천의식은 높은 산 정상에서 행해졌고, 산이 없는 평야지대에서는 제천 단(祭天壇)을 쌓고 제사를 드렸다.
그 평야지대에 쌓은 제단이 바로 피라미드의 시작이다.
이 피리미드가 후에는 통치자 무덤으로 변화한 것을 볼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문명, 이집트 문명도 우리가 주도했다는 것은 이미 기술한 그대로다. BC 6000년대부터 보리 등 농경민, 초원의 유목민, 산림의 수렵민 등이 공존하며 상호 필요한 물품을 교류하며 살았다. 티그리스·유프라테스 두 강의 유역은 토지가 비옥했으나 강우량이 적어 건조했기 때문에 지하수도, 제방, 저수지, 운하 등의 문명이 탄생하는 배경이 됐다. 필요한 물을 끌어 사용하는 관개(灌漑) 기술이 나오게 됐다.
우리가 역사에서 중원(中原)이라는 곳이 바로 황하지역을 말하는 것인데, 우리 민족이 이곳에 먼저 선주(先住)했다. 그 당시 황하유역의 사바나 지대에서는 사람들이 수렵, 목축과 함께 보리, 조, 등의 농경을 발달시켰다. BC 1500~1200년경에는 우리 한민족이 주축이 된 여러 도시국가가 이곳에서 탄생된다. 그 중 은(殷)나라가 가장 대표적이다. 은(殷)나라는 우리 한민족이 세운 나라다. 서아시아 북방 유라시아의 우리 민족이 청동(靑銅)의 칼 등을 갖고 왔기 때문에 어느 민족국가보다 강력한 왕조를 건국할 수 있었다. 황하문명에서는 뛰어난 청동기와 한자의 시조가 되는 갑골문자(甲骨文字)도 나왔다. 갑골문자(甲骨文字)는 주자(呪者)가 귀갑(龜甲), 우골(牛骨) 등을 불에 태워 그 위에 정치적 결정이나 곡물의 풍작, 흉작을 점치는 행위 등을 기록한 것을 말한다. 당시의 은 왕(殷王)의 묘나 궁전도 발굴되고 있다. 은허(殷墟)가 바로 그것이다.
중화역사 이전의 조선의 문명이야!
큰일이다. 일단 당국에 보고한 후에 다시 지시를 받아야 하니 지금까지의 발굴을 모두 그 자리에 두고 일단 오늘은 그만 나가세.
그날 밤 발굴중단과 동시에 철수명령이 내려졌다”
한민족 첫 세계문명 증거들…쌀·토기·활자·로켓·조선
이을형의 ‘법과 정의’…한국의 상고사 찾기(19)-신시배달국사(神市倍達國史)(11)
들어가며
인류문명 발원 ‘한민족 농업언어’
이을형의 ‘법과 정의’…한국의 상고사 찾기(20)-신시배달국사(神市倍達國史)(12)
들어가며
대빙하시대(BC 5만~2만5000년 전)에는 지구의 28%가 빙하에 뒤덮여 인간을 비롯한 지구상의 수많은 생명체가 얼어 죽을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 남부의 쇼베(Chauvet)동굴에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된 선사시대 동굴벽화(3만5000년 전)를 남겼던 인류와 다른 지역의 인류들은 혹독한 기후를 견뎌내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의 땅은 비교적 따뜻하고 다습한 기후가 유지된 천혜의 축복된 땅이었다. 그 증거의 하나로 충북 단양 금굴 유적지 한 곳에서는 20만 년 전 인류보다 훨씬 앞선 70만 년 전부터 후대까지 전시대에 걸친 유적들이 고루 발굴되고 있다. 공룡의 화석과 더불어 많은 발자국마저 발견되고 있는 것은 우리 땅이 빙하기를 이길 수 있었던 환경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한 2005년 제주도 서귀포시 상모리, 사계리(沙溪里)에서 2만여년 전의 호모사피엔스(Homo Sapience) 화석이 발견된 사실이다. 즉, 옷을 지어입고 언어를 구사하는 고도의 지능을 갖춘 인류가 지금의 우리 조상이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 사실은 KBS <역사스페셜-제주도 사람발자국 화석의 비밀>에서도 방영했다.
한민족, 서양보다 3700년 앞서 ‘지동설’ 입증했다
이을형의 ‘법과 정의’…한국의 상고사 찾기(21)-신시배달국사(神市倍達國史)(13)
들어가며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5천년 역사 운운하고 있으니 그 역사무지가 하늘에 닿아있다.
이로 인해 우리 한민족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을 갖지 못하고 있는 인사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지난 100여년 일본의 침략역사에 의한 괴기(怪奇)한 일들로 정신이 마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너무 국가에 대한 애국심이나 역사를 모른 채 잊고 사는 자가 많음에 놀란다. 국가는 없고 자신만이 잘살면 그만이다고 하는 망국적인 행태가 매일 뉴스를 통해 접하게 되는데, 왜 이렇게까지 망가졌는지 실로 안타깝다. 이번 칼럼에서는 우리 선조들이 얼마나 위대한지, 그 실체를 ‘천문학’에서 찾아 찾아보고자 한다.
이것도 중국의 경우는 한무제(漢武帝)시대 중국인이 서방의 세계와 접촉한 것이 태초원년(太初元年)에 행해진 역법개정(曆法改正) 운운하며, 이 무제의 역법(曆法)이 중국역법(曆法)의 기본이 됐다고 변조했다. 또한 일본 명치유신 이전의 역(歷) 즉, 구태음력(舊太陰曆)의 기본이 됐다고 요시가와 고지로(吉川幸次郞-경도대 교수)도 이와나미신서(岩波新書P214~5)에 버젓이 쓰고 있다. 참으로 못 말리는 행태다. 중국의 양심적역사학자인 서량지(徐亮之)는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에서 “책력을 만든 이는 희화자(羲和子)이다. 중국의 책력 법은 동이(東夷)에서 시작됐다. 그는 은나라 출신으로 동이의 조상이다. 동이가 책력을 만든 사실은 진실로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래서 세계천문학계에서도 가장 오래된 별자리 지도로 인정하고 있는 천문도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가 우리에게 있는 것은 우리가 천문학의 선구자로 결코 우연이 아님을 방증하고 있는 셈이다.
“지금의 중국이 한국, 현 중국은 본래 없었다”
이을형의 ‘법과 정의’…한국의 상고사 찾기(22)-신시배달국사(神市倍達國史)(14)
들어가며
지금 중국과 일본의 상고사는 거짓되고 왜곡된 허구의 역사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진실을 아는 학자들은 상대적으로 우리를 나무라고 있다. 그들은 많은 연구를 통해 역사의 무지로 잠을 자고 있는 우리를 일 깨워 주지만 한국사학을 장악한 학노(學奴)들이 연구도 하지 않고 있음을 한탄하며 우리에게 역사를 바로 알려주려 하고 있다.
우리나라 상고사와 고대사를 깊이 연구한 이들 세계 여러 나라의 석학들은 한민족이 인류 최초·최고의 국가를 건국하고 인류에게 찬란한 문명을 꽃피운 시원국(始原國)임을 무감각한 한국인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그들은 중국과 일본은 없는 역사도 조작하고 우리 역사를 도둑질하기 위해 가진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는데도 우리나라 학자들은 어찌해서 그들의 수족노릇을 하는지 알 수 없다고 이구동성 지적하고 있다.
일본의 양심적 학자들은 ‘한민족은 931회의 외침을 능히 저항했다. 그 정신에 대해 경탄을 금치 못한다’고(臺灣, 香港, 韓國の 民族P115)했다. 러시아의 학자 유엔 푸틴, 소련의 학자 시로코고르프를 비롯해 중국의 서량지(徐亮之)·임어당(林語堂)·왕동령(王棟齡)·임해상(林惠祥)·양관(楊寬), 대만학자 노간(勞幹)·필장박(畢長樸), 일본학자 아고 기요히코(吾鄕淸彦)·가시마 노보루(鹿島 昇)·미와 요시로(三輪義熙)·미와 구니미쓰(三輪邦光)·마스모도 젠노스케(松本善之助)·요사다(吉田八郞), 미국의존 카터 코벨(Jon Carter Covell) 모자 등은 우리 한민족의 위대한 역사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작금의 한국은 어떠한가. 국토가 분열돼 민족투쟁에 단결하던 민족이 부자형제가 총을 겨누는 파국에 처해 있다. 우리 스스로 자민족을 비탄케 하며 타민족을 경탄케 한 역사를 잃었다. 지난날의 그 경탄은 어디서 나오고 그 비탄은 어디서 나왔는가. 우리는 한국을 다시 발견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예전에 왜 중국(中國)이라 했던가. 이번 칼럼에서는 이와 관련해 우리민족이 얼마나 위대한 민족인가 에 대해 좀 더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 조선(祖先)의 역사를 보면 바이칼 호수와 유라시아, 중국 천산 우랄 알타이 등 대륙에서 경제적·사회적 생활조건을 찾아 중원과 요동을 거쳐 마침내 동방 해 돋는 곳에 이동했다. 이를 본 중국인들은 양곡(暘谷)이라 칭했다. 양곡(暘谷)은 해 돋는 동방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천산 태백산에서 짐승과 날 새를 상대로 한 유목생활도 했고 해 돋는 동방인 오늘의 중국 산동성(山東省)에서 아침에 떠오르는 해돋이 해를 보고 즐겼다. 그리하여 해(日)의 신화를 갖고 나라이름을 조선(朝鮮)이라 칭하고 고려(高麗)라 했다. 조선은 조일(朝日)이 선명(鮮明)하다는 뜻이고, 고려는 천일(天日)같이 높다는 뜻이다.
그 일례로 닭도 많이 양계(養鷄)했다. 그래서 닭(鷄)의 신화를 갖고 나라 이름을 계귀(鷄貴)라 칭하고, 계림(鷄林)이라고 했다.
또한 당시 지구상 다른데 없는 진단(震檀)이 생산됨으로 진단(震檀)을 존중했다. 진단(震檀)은 인삼(人蔘)의 별명이다. 인삼에서 신선사상이 발생해 신선국(神仙國)이라고도 했다.
우리 선조들은 특히 다른 민족이 인간을 발견치 못한 신학시대에 인간을 발견했다.
이를 본 중국인은 이(夷)라 칭했다. 이 이(夷)는 인(仁)하여 인간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다른 곳에 없는 고시(?矢), 석족(石鏃)을 발견하고 최초로 대궁(大弓)을 만들어 썼다. 이를 본 중국 고대인들은 다시 이(夷)라 칭했다. 이자(夷字)는 대궁(大弓) 이자(二字)로 구성되어 대궁(大弓)을 발견한 것을 가리킨 것이다. 또한 최초에 철을 발견하고 생산했다. 이를 본 고대 중국인은 철자(鐵字)를 金변에 夷字(金+夷)자(字)로 구성해 ‘金+夷’를 철이라고 하며 동이족이 철을 발견한 것을 표시했다.
우리 한민족은 인류의 대표라고 자처하면서 천신(天神)의 피를 받은 천민(天民)임을 천명하게 된다.
그리고 동이고략(東夷考略) 여직조(女直條)에 백두산의 호(湖)에서 동주(東珠, 진주의 일종)가 생산되는데, 귀한 자(者)는 직천금(直千金)이라고 했다. 연암집(燕巖集) 열하일기(熱河日記) 고려주(高麗珠)에 중국의 황제 황후가 동주를 보물로 간직했다고 쓰고 있을 정도다.
당시 지구상 다른 곳에 없는 진단(震檀)과 고시(?矢), 석족(石鏃), 동주(東珠)가 이 땅에서 생산됐다. 그것은 이 땅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자처할 수 있는 배경이었고, 실제로 우리나라를 ‘중국(中國)’이라고 칭했다.
중국(中國)이라는 명칭은 우리의 국명인데 지금의 중국은 우리나라의 역사를 훔친 데서 나온 것이다.
언제 중국이 있었는가.
오늘의 중국은 본래 없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권2-卷二 駕洛國記)에 수로왕(首露王)이 황천(皇天)의 명(命)을 받아 왕이 됐다고 하면서 가락국(駕洛國)을 ‘중국(中國)’ 이라고 칭했었다. 당시 가락국(駕洛國)도 중국에 있었다.
이 같이 우리 선조들은 중국의 원조다.
황천(皇天)의 명(命)과 결부된 중국(中國)은 세계의 중심지를 가리킨 것이다.
당시 중국인들은 우리나라를 군자국(君子國)이라 예찬하고 대국(大國), 구국(舊國)이라고 경외(敬畏)했다.
다시 말해 한국의 고유한 문화사상은 단군시대부터 조선조시대까지 5000여 년 동안 계승성쇠(盛衰)해 왔다. 5000여 년 동안 끊임없이 계승된 것은 그 사상에 깊은 철리(哲理)가 있고 튼튼한 생명력이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또한 삼국유사에 한민족(韓民族)은 천신(天神)의 피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고서(中國古書) 산해경(山海經)에도 ‘한민족은 천신의 양육을 받는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고서 독단(獨斷)도 ‘한민족은 천신(天神)과 지신(地神)의 피를 받았다’고 기록했다.
그러면 한국에 천신의 피를 받았다는 천민사상(天民思想)이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있겠는가.
인간사상, 천민사상, 중물사상 등 3대사상이 한민족의 고유한 문화사상이다.
이 문화사상이 경탄할 역사를 창조한 원동력이 됐다.
즉, 인간사상은 인화단결을 이룩하고 천민사상은 자존독립의 정신을 북돋고, 중물사상은 경이적인 기술을 발전시켰다. 이 사상들이 오늘에도 작용하고 있음을 망각할 수 있는 것인가. 경이적인 기술을 발견한 민족이 경탄할 역사를 창조할 것은 당연하다.
한국에 고유한 철학사상이 있다.
그러나 자기 발견에 맹안(盲眼)인 우리들이 이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그 중에는 남의 역사마저 송두리째 가로채 자기역사라고 하는 나라가 있고, 제 땅이 아닌데도 제 땅이라고 우기며 잘못된 과거마저 반성 할 줄 모르는 미친 나라가 있다.
그런데 더 나쁘고 희한한 나라가 있다.
인류의 문명을 이룩했음에도 모든 문화를 서양이나 중국에서 빌어 왔다는 열등감에 빠져있는 나라다. 조상이 곰의 몸에서 나왔다고 생각해 진짜 곰을 만들어 놓고 숭상하는 나라다. 미련하고 더러운 곰에서 나왔다고 해서 스스로의 뿌리를 더럽다며 역사를 버리는 나라다.
다른 민족의 신화는 인정하고 시험까지 출제되지만 정작 제민족의 신화는 미신이라고 치부하며 모르는 사람이 허다한 나라다.
제뿌리마저도 송두리째 가로채가고 제 선조의 유산이 하루가 다르게 남의 유산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데도 눈감고 딴청하고 있는 나라다. 자신들의 땅을 이웃에서 자기 땅이라고 우기는데도 눈치를 살피는 나라다. 심지어 가엾은 정신대 여인들을 매춘부였다고 조롱하며 한국의 국격(國格) 자체를 무시하는데도 오히려 불행한 백성의 한(恨)을 외면하는 민간 위주의 외교를 해야 한다는 나라다.
역사학과 국문학과를 졸업하지 않은 이들이 오히려 역사를 바로 세우려고 발버둥치는 나라다”
광복 60년이 지나도록 신채호 선생 같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무국적으로 방치한 나라다.
독립군 대장 홍범도(洪範圖)를 타국 땅 청소부로 일하다 외롭게 죽게 했던 나라다.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힘들게 살고 있는데도 챙기지 않는 나라다.
상해임시정부의 환국을 방해하고 망명정부의 임원이 아닌 개인의 신분으로 쓸쓸히 귀국하게 했던 나라다.
백범 김구 선생을 대낮에 암살할 수 있었던 나라다.
그래서 독립 애국활동을 한 것을 숨겨야하고 일제하의 삶을 공공연히 그리워 할 수 있는 나라다.
친일매국노들이 오히려 권력과 부를 차지하고 있는 나라다.
그래서 안중근 의사나 김구선생을 테러리스트라 하고 유관순을 여자깡패라고 막말을 하는 일본을 방관하고 있는 나라다.
나라의 근본이며 생일인 개천절행사에 대통령이 참석하지 않고 국무총리를 보내 스스로 국격(國格)을 낮추는 나라다.
독립국가라면서 서양의 나이인 서기를 아무생각 없이 지금도 쓰고 있는 나라다.
왜 이 같은 결과들이 나왔는지 제나라의 정체성은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지 또 나라의 정통성은 있는 것인지 제대로 생각지 않는 나라다.
그러면서도 말은 많고 남만을 탓하는 나라다.
그리하여 외국의 학자들도 자신의 있는 역사와 문화마저 없다고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며 조롱하는 나라다”
우리는 이 시대의 증인노릇도 진실의 등불을 켜들지도 못하고 있다. 이는 비극중의 비극이다.
오늘 역사적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비참한 자화상이다. 역사는 사람들에게 과거에 대해 알려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미래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있게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위대한 역사를 창조한 선조들이 하늘에서 통곡할 일이다. ‘칼라일’은 “역사는 사가(史家)가 현명한 만큼 그리고 안식(眼識)과 기백(氣魄)을 타고 난 만큼 완전하다”고 말했다.
우리의 사가들은 현명한 안식과 기백을 타고 난 만큼 완전한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랫동안 잘못된 중화주의와 식민사관에 익숙해져 7천년간이나 세계를 지배했던 제국의 역사를 발로 차 버리는 오늘의 한국 사학계는 진실로 정상이 아니다.
피라미드, 고구려와 단군조선
함양지역(중국 섬서성)에 무수히 산재한 피라밋들,
서안(시안西安,장안長安)에서 3십여Km 떨어진 함양지역에서는 정체불명한 피라밋들이 수없이 많이 발견
되고 있다. 현재까지 새로 밝혀진 피라밋은 100여개 이상으로 평균높이가 25~100m에 이른다고 한다.
큰것은 저변길이가 300m 정도나 되며,이집트 쿠푸왕의 大피라밋보다 더 큰것도 있고. 제작시기도 이집트
보다 한 2천년 앞선다고 한다. 이런 거대 피라미드를 축조하려면 고대기술로 연인원 100만명 이상이 소요
된다고들 하는데...
Hartwig Hausdorf씨 촬영 피라미드군락 사진, 서안(장안) 서북방 함양 인근지역
할트위그 하우스돌프씨가 촬영한 피라밋들(북중국 함양지역)
1990년 훨씬 이전부터 나무로 뒤덮인 피라미드(Hartwig Hausdorf 사진)
지켜야 할 귀중한 역사현장, 신성한 피라미드에 나무를 심어놓다니...!
피라미드에서 밭가는 중국농부.주민들은 피라미드에는 관심이 없다고 한다
복토를 해서 나무를 심었다. 나무가 자라면 뿌리를 내릴꺼고, 그러면 피라미드가 파괴되고....
지나인은 저들 조상묘가 아니니까 조림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적어도 화족의 묘는 아닐 것이다.
외국인들은 근처에 접근도 못한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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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최초 발견은 1945년에 인근을 비행하던 독일주둔 미국 수송기조종사의 사진촬영과 보고서에 의해서였고.
그 전까지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산으로 알고 있었다죠.
이 거대한 피라미드들은 1973년에 실시된 고고학계의 탄소연대 측정법에 의해, 진시황무덤보다 수천년 앞서
만들어진 것임이 밝혀지게 되었죠.(약 5,6천년 전으로, 황하문명 이전)
현재, 이 유적들은 중국 공안당국이 숨겨서, 학술조사도 불가능하며 중국당국도 연구를 제대로 하지 않는
답니다. 독일인 하우스돌프씨가 촬영한 피라미드 사진을 책으로 펴내어 서방세계에 북중국 피라미드를
알리게 됩니다.
세계역사를 다시 써야하는 고고학발견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미국과 유렵 고고학자들이 중국정부에
발굴을 허가해 달라는 메시지를 수차례 보냈죠.
중국정부에서는 북중국 및 만주땅에는 옛날부터 야만민족과 기마민족들이 살았던 곳이라 진보된 문명이
없다고 말하고, 독일학자의 사진과 보고서는 조작이라고 발뺌하였습니다. 하지만 서구학자들의 발굴요구
및 서구 케이블TV에서 카메라로 찍어 서구사회에 방송하는 노력에 힘입어, 중국 일부학자들이 그 존재를
인정하고 "아직 발굴기술과 유물 보존기술이 부족해 다음세대로 발굴을 연기하게 되었다" 고 합니다.
이 북중국 피라미드들은 위로 갈수록 좁아지고 계단식 모양을 띄는 만주와 한반도에 널려있는 고구려
무덤과 똑같은 모양과 형태를 보이고 있지요. 학계에서는 이러한 건축공법을 [들여쌓기 공법]이라고
부르며, 중국과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고구려 고유의 건축공법이라는데 이의를 다는 학자는 없답니다.
그러면 5천년전 이 지역에서 이런 문명을 가진 집단은 누구였을까? 중국인이었을까? 중국인은 황하유역
에서 농사짓고 있었다. 몽골인이었을까? 몽골인들은 당시 존재도 없었다. 거란족? 오환족? 이들은
유목민으로서 정착문명과 관계없다. 여진족? 이들도 유목민이죠... 그러면
중국 서안지역의 피라미드에 관하여
중국 서안지역의 피라미드는 서방세계에서 먼저 확인하여 그 내용을 공동으로 조사하고자 요구 하였지만 중국측은 거부하였습니다. 자국내의 유적을 공개하지 않는 것은 자국의 자유이므로 어쩔 수 없습니다.
중국측에서 유적의 공개를 거부하고 조사 내용을 공개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서안지역의 유적은 화하족이나 진시황의 진나라 유적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문제를 이렇게만 바라 볼 경우 우리는 서안지역의 피라미드를 그다지 주목할 이유가 없습니다. 서안지역은 한민족과 너무나 먼 거리이기 때문에 구태여 우리 문명과 관련도 없고 중국이 공개하기를 거부하고 있는 마당에 굳이 알고자 할 필요성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약간의 상상이 발동합니다.
중국 화하족과 진시황의 진나라 유적이 아닌 것은 확실한데, 도대체 그들을 제외 하고 서안지역 유적의 주인은 누가 될 수 있는지, 그 실체는 전혀 파악할 길이 없습니다.
물론, 환상적인 고조선설을 믿을 경우, 고조선의 문명이라고 말 할 수도 있겠지만,환상적인 고조선 설은 일부의 한국인을 제외하면 여전히 소설과 같은 이야기로 치부합니다.
내가 이 문제를 주목하고 고민하는 이유는 환상적인 고조선설을 믿어서라기보다는 자신의 유적이 아니라고 하여 나무를 심어버린 저 상황을 보고 화가 좀 났기 때문입니다.
피라미드의 주인은 고대왕국의 왕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은 유적입니다. 중원문명을 일이킨 족속은 동이족인데, 동이족의 원류문명이 홍산문화에서 태동하였을 가능성이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습니다. 또한 고조선문명은 홍산문화의 후예일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과연 홍산문화의 후예들이 서안지역의 피라미드를 유적의 주인이었을까?
여전히 확답할 길은 전혀 없습니다. 단지, 전혀 아니다라고 할 수는 없지 않겠냐는 의문을 가질뿐입니다.
서안지역의 피라미드 유적의 주인이 화하족과 진나라의 유적이 아닌 것이 확실한데, 그들을 제외하면 주변지역에서 주목할 문명은 홍산문화 뿐인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입니다.
혹시나 서안지역의 피라미드유적이 고조선의 문명이 맞다면 저 나무 따위는 우리손으로 뽑아내야 합니다.
중국의 한~~~>>족들은 저 문명의 주인이 누구인 줄 확실히 알고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발굴한 결과가 자신들의 역사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여 무조건 감추기만 하는 것은 대국의 처사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일부 한국인들은 서안지역의 유적을 발굴한 장문구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장문구가 실존인물인지, 누군가가 조작하고자 가공으로 내세운 인물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일부 한국인이 알고 있는 자료를 올려봅니다.
중국것은 최대 300미터 / 연대는 10,500년전 건설 추정
이집트 것은 최대 150미터 / 연대는 4,600년전 건설 추정
→ 그림을 클릭하시면 큰 그림으로 보실수 있습니다
- 서안 유역에는 위성사진에 점들로 보이듯이 수백기의 피라미드가 있는데 일부는 파괴되었다는 소식...(아~)
- 아직 확인해야될 사항이 많지만 무조건 부정하는 것도 경계해야...21세기는 과학시대...
운영자가 치우천자의 역사를 최초 공개하였을때 '미친O'이라 수많은 공격을 받은적 있지요.
지금은 입장이 꺼꾸로 되었지만(그놈들 입을 재봉틀로 박아버려야^.^)
서안 아래 피라미드도 상당한 이슈가 될 것입니다.
우리역사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필연적인 결론에 도달할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
감추는 것도 곧 한계에 다다를 것입니다
함양피라미드, 서안피라미드
중국 함양(Xianyang) 북동지역과 서안(장안) 동남지역에 산재한 동이족 피라밋들.
함양피라밋문화,앙소문화,홍산문화,서단산문화, 함양 大피라밋 밀집지역(환국,배달,단군조선?)
함양,서안(장안)인근 15~30Km 피라밋군락, 함양 大피라밋, 무릉(하얀피라밋?), 오리온피라밋
함양지역, 서안(고대 앙소문화)지역, 여산지역(병마용갱) 피라밋군락지,
함양지역 인공위성사진(Google Earth, 서안 서북 30km)
1)大피라미드(242m x 224m), 2)무릉(하얀피라밋? 234m), 3)피라밋(175m), 9)하우스돌프 사진(↓)
9번, 독일인 Hausdorf씨가 중국 함양지역에서 촬영, 세상에 처음 공개한 피라미드군락 사진.
☜독일학자(Hartwig Hausdorf)가 촬영한 사진
좌표 34 22 29.08 N 108 42 04.36 E
☞외국사이트에서 사진판독하여 그린 배열도. Hausdorf 사진의 현재모습. 위치는 함양 북쪽.
9번, 중소형 피라미드군 중에서, 그중 큰 피라밋(저변길이 약88m)
2번 무릉(茂陵? 하얀피라미드?), 6번 피라밋(163m), 7번 피라밋(160m), 9번 하우스돌프 피라밋군
2번, 무릉(茂陵,서안 서북쪽 30Km), Hartwig Hausdorf 하얀피라미드(234x231m)
6번 피라밋(163m)
7번 피라밋(160m)
9번 피라밋(88m), 4번 피라밋(172m), 1번 大피라밋(242m), 8번 피라밋(131m), 3번 피라밋(175m)
4번 피라밋(저변 172m)
3번 피라밋(저변 175m)
8번 피라밋(저변 131m)
9번,4번, 우측위, 피라밋(저변 75m)
1번 大피라밋(242m), 8번 피라밋(131m), 3번 피라밋(175m), 5번 피라밋(170m),
1번 大피라밋, 함양지역에서 가장 큰 피라밋, 밑변(242m x 224m,구글어스 )
1번 大피라밋, 저변길이 242m x 224m, 함양 북부지역, 오른쪽, 중소형 피라밋 80m x 78m
5번, 함양피라밋(170m*168m) 서안(장안,시안 Xi'an)에서 20Km 북쪽 지역
8번,3번 피라밋 우측 위에서 보이듯, 여기저기에 널려있는 30m~50m 소형피라밋들...(↓)
함양지역, 상대적으로 소규모(저변길이 30m~50m) 피라미드 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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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주(周),한(漢),수(隋) 시대 왕릉이라고 명명(?)한 피라밋군, 과연,근거가 명확한지...?
11번, 170m 피라밋
12번, 158m 피라밋
13번, 153m 피라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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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장안) 동남지역에 있는 피라밋들.
서안 동남쪽 15Km, 앙소문화지역 피라밋군, 널리 알려진 오리온좌 모형과 대형피라밋,
1번, Banpocun(반파) 오리온좌 피라밋 배치모습, 2번,3번, Dizhai(적채) 피라밋,
7천년 전 유물이 다량 발굴된 앙소문화의 고대유적지.
중앙 왼쪽은 Banpocun(반파,반포)지역, 오른쪽은 Dizhai(적채;狄寨)지역,
1번,오리온좌 피라밋, 2번,175m 적채피라밋, 3번,152m 적채피라밋, 앙소문화 고대유적지
서안,동남 15km Banpocun(반파)지역,오리온좌 모형 피라밋
오리온좌 배치로 유명한 서안(장안) 반파 피라미드의 과거(左)와 현재(右)
오리온좌 피라밋군락, 오리온좌, 1번 168m, 2번 154m, 3번 80m,
최근에는 위장을 해놓아 좌표를 모르면 찾기가 어렵다. 상대적으로 조그마하게 보이는 피라밋들은 이미
파괴된 것 같다. 작은? 피라미드(30m~50m)가 얼마나 많았는지..? 이 서안피라미드(오리온좌)는 여러
정황상 적어도 5000년 이전 고조선유물이라는 설이 있다.
오리온좌 1번,168m 피라밋,
오리온좌 1번, 168m 기단식 피라밋, 중국당국이 명명한 두릉(杜陵), 서한(漢) 선제릉(宣帝陵?)
오리온좌 2번, 154m 피라밋,
오리온좌 2번, 154m 피라밋, 중국당국이 명명한 서한(漢) 선제비릉(宣帝妃陵?) ☞[참고]
오리온좌 모형 피라밋군, 3번 80m, 4번 63m, 7번 50m,
오리온좌 3번, 저변 약80m 피라밋, 1번에 딸린 무덤,
오리온 4번, 저변 63m 피라밋
오리온 7번, 저변 50m 피라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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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번,3번, Dizhai(적채) 피라밋,
2번 피라밋, 저변길이 175m(진입로와 정문), 3번 피라밋, 저변길이 152m,
2번, 175m 적채피라밋, 깔끔하게 정리된 진입로와 정문(확대,左上),
2번, 175m 적채피라밋, 피라밋 중앙에 정상으로 오르는 길.....
2번, 175m 적채피라밋, 우측으로 진입로와 정문이 나 있다.
3번, 152m 적채피라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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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집안에 있는 피라미드들,
만주, 길림성 집안, 고구려 환도산성(丸都山城) 아래 피라밋군락,
만주 집안, 고구려 환도산성(丸都山城) 아래 피라밋군락,
[펌] 실제로 엄청난 피라밋들이다. 피라미드는 이집트와 남미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중국에도 엄청나게 있다.
저 피라밋들은 아마도 고조선시대부터 고구려시대까지 수천년을 이어내려온 것으로 보인다. 즉 수천년 동안
만주와 중국대륙 북부는 실제적으로 동이족의 영토임을 말해주는 것이며, 동이족의 문명이 중국 황하문명
보다 훨씬 오래되었고 고도화된 것으로 보인다.
독일학자들이 계속적으로 피라미드 발굴을 요구하자, 중국정부측은 사진이 조작되었다고 거부하다가, 갑자기
고구려도 중국역사였다며 동북공정을 내밀고 있다. 결국 동북공정이 세상에 먹히면 저 피라미드들도
중국인이 세운 것이라고 둘러대며 세계에 공개할 것이다.
하루빨리 우리 고대사에 대한 전면적인 재조사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매국노 이병도가 이끌었던 강단사학자들의 농담따먹기식 역사교육은 필요없다.
도대체 저 피라미드를 중국인들이 왜 숨기는 것이냐. 5천년 전에 중국 북부에 어느나라가 저런 문명을
가질 수 있을까. 5천년 전이라면 황하문명의 시작으로 봐야 하므로 중국도 아니다. 중국인들이 숨기고
있는 것으로 봐서 저들도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바로 고조선이다. 5천년 전에 중국북부와 만주에 있었던 나라는 고조선밖에 없다. 도대체 우리는 고조선과
고구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저 피라미드를 보고 우리 고대사에 대한 연구와 인식이 완전 잘못
되었음을 느낀다. 지금이라도 전면적인 재조사가 필요할 때이다.
[펌]☞http://www-nozzang.seoprise.com/board/view.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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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http://blog.daum.net/sabul358/4399090
하얀피라미드는 함양 북쪽에 있었다.
하우스돌프(Hartwig Hausdorf )의 저서 하얀피라미드(『Die Weisse Pyramide』)는 1994년 Georg Muller
출판사에서 발간된 이래 유럽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2002년에 3판을 찍었다.
하우스돌프는 3장, 75~81페이지에서 "하얀피리미드는 Shaanxi지방, 서안 남서쪽 약60 km인 QinLing-Shan
산악지대에 있는데, 300m가 넘는 중국과 전세계에서 가장 큰 피리미드다." 라 소개하면서, 문제의 사진
(Nr. 10, 11 12)을 96페이지에 싣고 있다.
하우스돌프의(Hartwig Hausdorf)의 하얀피라미드는 무릉(茂陵)이다.
독일학자 Hartwig Hausdorf 의 저서 "White Pyramid" 중 한 페이지
左下(10번)는 서안 남서쪽에 있는 것으로 2차 세계대전 말경에 한 미공군에 의해 찰영되었다고 하며,
右(11,12번)는 서안 근방에 있는 수많은 피리미드중 두개를 찍은 사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좌측은 위성사진이고, 우측은 구글어스(google earth)로 잡은 함양 인근지역이다.
주위가 조금 달라지긴 했어도 같은 장소가 분명하다.
좌측은 하우스돌프책자의 하얀피라미드 지형, 우측은 피라밋지역에서 찾은 비슷한 지형. 두 지형이 동일하다.
위 지도의 실제 지형이다.
"white pyramid" 영문 번역판에는 (It is found in Tibet - located in the Qin Ling Shan mountains, about
100 km southwest of the city of Xi'an) 라 되어 있지만, 무언가 오류가 있다.
문장 중에 "Tibet - located" 는 "Tibet and located" 의 의미나 "티벳과 골짜기 사이"로 해석되고, 서안 북서쪽
100km지점의 진령산맥 골짜기에서 남동쪽으로 이해되어야 하지 않을까?
무릉(武陵)에 나무를 심기 전 모습
나무를 심은 무릉, 주위에 아무것도 없는 걸로 봐서,오래전 모습인 듯.
중국당국은 무릉(茂陵?)을 서한시대 무제(武帝)의 능이라 하며, 무릉박물관을 꾸며 공개하고 있다.
무릉은 서안에서 30여km 떨어진 흥평현(興平縣)의 동북쪽 무릉촌(茂陵村, Maoling))에 위치한다.
높이는 46.5m, 아랫부분은 동서 2백31m, 남북 2백34m로, 함양지역에 있는 서한시대 황제의 능 9개 중에서
가장 크다는데, 하우스돌프가 높이 300m라고 한 기록은 밑변길이의 오식일 것이다.
[펌] 1912년, 여행자 'Schroder'가 했다는 말이 생각나는데,
"과거에 피라미드는 돌로 명백하게 분할되어 덮였었다, 그러나 그 돌들은 사라졌다. 약간의 돌만이 바닥에
묻혀있다. 그옆은 크게 자연적 배수로가 생겼다. 그래서 돌이 무너지고 아래로 굴러 떨어진 것이다.
농부들은 그 돌을 가져다 집을 수리하거나 하는데 사용했다. 지금은 나무와 관목으로 커버되어 거의 자연적인
언덕처럼 보인다. 우리는 피라미드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어떤 계단 또는 문도 발견할 수 없었다."
1963년 중국 고고학자 "장문구"가 했다는 말도 생각난다,
"많은 피라미드가 있었고 그중, 큰 순서대로 세개를 각각 발굴했다. 피라미드 중 가운데 것이 가장 컷다. 한민족
관련유물이 쏟아져나오자 발굴중단명령이 떨어졌고, 절대 비밀...." ☞장문구
무릉을 보고온 사람의 말을 빌자면,
한무제가 실제로 입었다는 금루옥의, 옥상, 옥장 등이 매장되었으나, 모두 도굴되어 현재 무덤 내에는 아무런
부장품이 남아있지 않다고 하고, 이런저런 것들을 모아서 곽거병묘 앞쪽에 위치한 무릉박물관에, 곽거병묘
에서 출토된 부장품과 같이 전시되고 있다고 한다.
무릉(茂陵),곽거병묘,무릉박물관
2번, 무릉 234m, 곽거병묘(4각형 중앙), 무릉박물관, 우측끝, 73m 피라밋,
2번 무릉(한무제?) 동쪽위 무릉박물관, 곽거병묘(중앙), 옆에서 훼손되고 있는 피라밋(위청묘?)
윗그림을 보면 곽거병묘는 무릉보다 훨씬 규모가 작지만, 많은 신경을 써서 만들고 관리한다는 것이 눈에
보인다.
조그마한 곽거병묘, 옆에 그보다 훨씬 큰 이 피라밋(위청묘?)은 왜 방치할까?
한무제(?)릉을 보고 있자니 "어느날 저것이 뭉개지고 흔적조차 없어질 수도 있겠다" 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중국정부의 행태를 보면 말이다.
서안 '하얀 피라미드'를 둘러싼 여러 증언들은 최소한의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이고, 자랑을 해도 모자랄 이
피라미드형 고분유적에 대한 중국의 태도는 너무 이상할 정도가 아닌가?
결론은 "무(武)릉의 주인공이 한(漢)의 무제(武帝)가 아닐 가능성도 있다" 는 것이다
서안 피라미드의 진실 감추는 중국정부
"진시황의 다른무덤으로 추정되는 유적을 조사해야하니 대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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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티즌 역사칼럼] 중국 서안지역 피라미드 발굴에 참여한 중국인 故 장문구(張汶邱 )씨가 임종전 증언내용이다.
"1963년4월에 우리 고적발굴팀 36명은 당국으로부터, 진시황의 다른무덤으로 추정되는 유적을 조사해야하니 대기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출발전, 조사단장은 우리발굴단원들에게 이번 유적은 매우 중요하여 조사,발굴 내용을 외부에게 일체 누설하면 안되니 이점을 각별히 유념하기 바란다고 말하였고, 우리일행은 기차와 버스,트럭을 나누어타고 이틀만에 목적지인 넓은 평원지대에 도착하였는데 창밖으로 이집트 피라밋처럼 거대한 피라미드들이 많이있었고, 도착한 우리발굴단원들은 하나같이 모두 탄성을 질렀어요. 우리 중국에도 이런 피라밋이 있었구나! 하는 기쁨과 경이로움이 뒤섞여서 말이죠, 우리는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의 또다른 이 엄청난 유적을 발굴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조사단은 4팀으로 나뉘어져 이후 3일동안 피라미드의 가장 큰 순서대로 먼저 가운데 3개 피라미드를 지정하여 발굴하기 시작했습니다. 3곳다 거의 한 형태의 것이었는데 이중 양옆의 두곳보다는 가운데것이 대단했어요.거대 한 벽돌 피라밋 지하입구로 들어가자 약 3~5층으로 석실이 나뉘어져 있었고, 상층부 공간으로 들어갈수록 말과 마차를 그림으로 화려하게 조성된 벽화, 그림, 여러 문자(중국글 한국글등)들, 조각류 약 6200여점, 맷돌, 절구, 솥, 그릇등 생활도구 1500여점, 배추김치(원래김치인 백김치) 동물의 뼈등 음식물 400여점, 청동검, 활, 금관(신라형),칼,창등 장신구류등 부장품 7800여점, 상투머리를 한 정 중앙시신(진시황의 모습과 흡사했슴)등 14구과 호위상 3000여점 등이 대량발견 되었습니다.
우리는 난생처음보는 이러한 너무나도 엄청난 유물, 유적에 대해 모두 하나같이 무엇에 홀린듯하였으며, 마치 외계인의 세계,외계인의 무덤을 발굴하고있는듯한 느낌들이었습니다.저는 그 유물들을 확인하면서 목록을 작성하는 일을 했었는데, 작업 3일째되던날 대충 7할정도 파악, 작성된 상황이었고 이날 오후쯤에 이를 당시 발굴 단장이던 모 교수에게 중간 보고하자 그분은 큰 한숨을 내쉬면서 이런말을 했어요, “이 유적은 우리 화하족유물이 아니라 조선인들의 유적이다...중화역사 이전의 조선문명이야! 라고 말하면서 큰일이다!..
일단 당국에 보고 한 후에 다시 지시를 받아야 하니 지금까지 발굴을 모두 중단하고 유물들은 모두 그자리에 두고 일단,오 늘은 그만 나가세!" 라고 말하여 모두 발굴을 중단한채 나와 숙소에 있게 되었는데, 그날 밤 발굴중단과 동시에 철수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우리 발굴단원들은 모두 의아하게 생각했으나 곧 그 유적이 우리의 유적이 아니기때문이라고 이해하였고 일행은 그곳에서 떠나기에 앞서 숙소에서 현지공안에게 이곳에서의 비밀을 지키겠다는 서약서를 작성 제출였고, 그렇게 돌아온 이후, 그 피리미드들에 관해 더이상 들은적은 없습니다. 그게 그 피라미드에 대한 저로써의 마지막이었고 제가 아는 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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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장문구(張汶邱 )씨의 임종 전 증언내용처럼 내몽골, 만주, 북중국 지역에 가면 정체불명의 피라미드들이 수 없이 서 있다. 현재까지 밝혀진 것은 100개 이상이다. 평균 25 ~ 100 m 높이의 피라미드들이다. 그 중에는, 뉴욕의 엠파이어 스테이츠 빌딩과 맞먹는 300 m의 높이를 가진 것도 있다. ( 63 빌딩의 거의 2배 가까운 높이 ) 이집트의 기자 피라미드보다 거의 2.3배 정도 높고, 면적 또한 여의도보다 큰 거대한 건축물이다. 이런 것을 축조하기 위해서는, 고대의 기술로는 연인원 100만명이 소요된다고 한다.
최초의 발견은, 1945년에 인근을 비행하던 미국 수송기 조종사의 사진촬영과 보고서에 의해서이다. 그 이전까지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산으로 알고 있었다.
1963년에, 중국의 고고학자들은 이들 거대한 피라미드를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의 무덤으로 예상하고 발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73년에 실시된 고고학계의 탄소 연대 측정법에 의해, 그 거대한 피라미드는 진시황의 무덤보다 수 천년 앞서 만든것 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현재, 이들 유적들은 중국 공안 당국에 의해 철저하게 숨겨지고 있다. 중국정부는 무엇이 두려워서 서안지역에 산재되어 있는 거대한 피라미드 무덤군들에 발굴과 촬영과 출입을 금지시키고 나무들을 심어서 진실을 은폐하려는 것일까? 그것은 고대 세계사의 주역이였던 동방족(동이족=한반도 사람들)의 실체를 감추려는데 있는 것이다. 그럼 무덤양식을 통해서 동방족의 역사적 실체를 자료들을 토대로 알아 보기로 하자.
한반도 고인돌 무덤의 위상
세계 고인돌 분포의 비중의 70%은 한반도지역에 분포되어 있으며,피라미드 무덤양식의 기원이 되는 남방식 고인돌(땅을 파서 시체를 묻는 다음 돌이나 흙을 덮는 방식으로 피라미드양식.홍산문명의 무덤양식과 고구려의 적석총양식의 원형)은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한반도 남부지역에 집중 분포되어 있으며, 연대는 8천여 전의 무덤양식으로 한반도 사람들의 고유한 무덤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고인돌 무덤양식은 단군조선시대의 무덤양식이라기 보다는 단군조선이전부터 전해 내려온 만주와 한반도와 산동반도에 분포된 동방족의 고유한 무덤양식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분포지역이 한반도를 중심으로 만주와 산동반도,그리고 열본의 큐슈지역에 분포된 것으로 보아 고인돌문명의 중심지는 역시 서해가 바다가 되기전에 [마]문명의 중심지였다고 볼 수 있는 한반도 서남해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한반도 서남해 지역을 중심으로 콤파스를 그리면 둥근 원지역으로 만주와 한반도,그리고 산동반도와 일본열도가 들어온다. 그래서 피라미드.고구려 적석총.홍산무덤양식의 원형이 되는 남방식 고인돌무덤양식의 주인들 또한 한반도 서남해지역의 [마]문명인들이라고 할 수 있으며, 서남해 섬들에도 고인돌 무덤들이 많이 산재한 이유가 될 것이다. 서해가 바다가 되면서 육지로 이동하게 되었는데, 호남지역에 남방식 고인돌무덤들이 집중 산재해 있는 것으로 보아 서남해 지역에서 가까운 호남지역으로 집중 이동한 것으로 보이며, 점점 북으로 이동하여 만주와 연해주를 중심으로 다시 유라시아와 아메리카로 이동한 동방족(한반도사람들)이 피라미드와 적석총 무덤양식으로 대변되는 환국문명.홍산문명.슈메르.이집트.마야.아즈텍 문명의 주인들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은 과학적 증명을 토대로 하는 고고학.유전학을 통하여 증명되고 있다.
예컨대, 이집 트 피라미드의 주역들도 고대 한반도 사람들이 부적으로 사용한 3마리 물고기 문양을 제사그릇에 표기하여 사용한 한국인들임이 밝혀졌다. 그리스.이집트.히브리.인더스문명 등 서양문명의 기원민족이 되는 슈메르인들도 언어와 풍습과 문자.천문내용이 고대 한국인들과 동일한 동방족임이 밝혀졌으며, 지금의 서양언어(인도-유럽어족) 또한 그 조상어가 아리안족이 사용했던 고대 인도의 고급언어로써 불교범어로 사용된 산스크리트어인데, 이 고급언어라는 산스크리트어가 고대 한국어라는 사실이 증명되었으니, 과히 고대에는 한반도와 만주에서 터를 잡고 살았던 우리 동방족의 독무대였음이 명확히 입증된 셈이다. 그래서 "빛(문명)은 동방(한반도)에서!"라는 로마의 격언이 나온 것이며, "동방의 등불 코리아"라는 인도시성 타고르의 시어가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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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무덤
청동기시대의 무덤양식으로는 고인돌·돌널무덤·독무덤[甕棺墓]·움무덤[土壙墓] 등이 새로 들어와 초기철기시대까지 그 전통이 이어졌다. 고인돌은 선사시대 유적 중 가장 특징적인 성격을 가진 것으로, 제주도를 포함한 한반도 전역과 일본 규슈[九州], 중국 랴오둥반도 등에 퍼져 있으나 한반도에 가장 조밀하게 분포되고 있다. 서유럽의 고인돌과 비슷한 것도 있으나 이들과는 직접적인 관계는 없고,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과 한반도에서 독자적으로 발생한 무덤형식인 듯하다.
고인돌은 주검의 위치에 따라 크게 두 가지 양식으로 나뉜다. 판돌[板石]로 땅 위에 네모난 방을 만들어 주검을 넣고 그 위에 크고 넓은 돌을 얹은 탁자식(卓子式) 또는 북방식(北方式)과, 땅 밑에 판돌 및 깬돌[割石]로 널을 만들어 주검을 넣은 뒤 굄돌[支石] 또는 돌무지 위에 덮개돌을 덮은 바둑판식[碁盤式] 또는 남방식이 있다.
북한학계에서는 대표적인 출토지의 지명을 따라 전자를 오덕리형고인돌, 후자를 침촌리형고인돌이라고 부른다. 고인돌에는 민무늬토기·붉은간토기[丹陶磨硏土器]·반달돌칼·돌검·돌살촉이 묻혀 있는 것이 대부분이며, 비파형동검을 부장하는 경우도 있으나 대체로 청동제품은 발견된 예가 많지 않다.
돌널무덤은 지하에 판돌 ·깬돌로 널[棺]을 만들고 판돌 및 나무판자로 뚜껑을 덮은 것으로, 대개 북방 시베리아 계통의 무덤 양식으로 보고 있다. 봉분(封墳)이 거의 보이지 않으며, 지역과 묻힌 자의 신분에 따라 형식과 껴묻거리의 양이 다르다. 여기에는 돌검·돌살촉·민무늬토기·붉은간토기·검은간토기·가지무늬[彩文]토기 등이 출토되며, 간혹 청동기도 함께 나온다.
충남 일대에서 발견되는 돌널무덤은 깬돌로 널을 만들고 구덩이의 윗부분을 돌로 채우는 특이한 형식으로, 한국식동검을 비롯한 청동거울, 각종 의기(儀器), 덧띠[粘土帶]토기, 검은간토기 등이 출토되어 지역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부여·공주 일대에서는 이 시대의 독무덤도 나오는데, 바닥에 구멍을 뚫은 일상용 토기를 바로 세워 묻고 아가리를 판돌로 덮은 형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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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돌무지무덤 [積石塚(적석총)] =한반도 남방식 고인돌
돌무지시설을 한 점에서 침촌리형(남방식) 고인돌과 공통되므로, 원래 고인돌인 무덤이 후대에 상석이 없어져 돌무지무덤으로 된 가능성도 있다. 청동기시대 초기의 것으로는 랴오둥반도[遼東半島] 일대의 장군산(將軍山) ·노철산(老鐵山) ·우가촌 타두무덤 등을 들 수 있다. 돌무지 밑의 묘광 배치는 중심적인 주체가 없고, 시설규모 또한 특별한 무덤이 없으며, 부장품에서도 서로 차이가 없다. 따라서 무덤의 피장자는 가족이거나 서로 밀접한 혈연관계가 있는 구성원으로 보인다. 이처럼 피장자 사이에 부장품 및 무덤시설의 차별이 없는 돌무지무덤은 남한지역에서도 보이는데, 한강 상류의 춘천시 천전리(泉田里) 돌무지무덤과 제주시 용담동(龍潭洞) 돌무지무덤 등이 있다. 이들 무덤에는 부장품으로 토기편과 석촉 등의 석기류 몇 점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무덤은 다음 시기에 이르면 많은 사람이 묻히고, 중심과 주변 무덤구덩이 간에 부장품과 무덤시설에서 차이가 나는 무덤으로 변하는데, 랴오둥반도 다롄시[大連市]의 강상(崗上)과 누상(樓上)무덤이 대표적이다. 강상무덤은 동서 28 m, 남북 20 m의 직사각형 묘역 안에 23기의 무덤이 있는데, 판돌로 정성들여 만든 7호무덤 주변으로 자갈로 거칠게 만든 22개의 무덤구덩이가 배치되었다. 그리고 이들 주변의 무덤에서는 140여 명이 한꺼번에 화장(火葬)된 채로 묻혀 있고, 누상무덤(동서 30 m, 남북 24 m)에서도 1 ·2호 돌덧널무덤 주위에 있는 10개의 돌덧널에서 화장된 많은 뼈가 나왔다. 부장품으로 비파형동검을 비롯한 마구류 ·수레부속 ·방패 ·활촉 ·도끼 ·끌과 각종 장신구가 나옴에 따라 북한학계에서는 이들 무덤을 수십 명의 노예를 순장한 노예소유자무덤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단계의 돌무지무덤은 이후 고구려와 백제 초기에 보이는 돌무지무덤으로 연결된다. 고구려는 건국 초부터 돌무지무덤을 조성하여 왔는데, 압록강의 지류인 훈강[渾江] 유역의 랴오닝성[遼寧省] 위안런현[桓仁縣]지방과 압록강 남안인 독로강(禿魯江) 유역의 시중군(時中郡) ·자성군(慈城郡) ·위원군(渭原郡) 등에 군집되어 있다. 초기에는 강가 모래바닥에 냇돌을 네모지게 깔고 널[棺]을 놓은 뒤 다시 냇돌을 덮는 정도의 간단한 구조였으나, 점차 냇돌 대신에 모난 깬돌[割石]을 써서 벽이 무너지지 않게 계단식(階段式)으로 쌓았으며, 돌무지의 외형은 대체로 방대형(方臺形)을 이룬다. 이것이 3세기 말~4세기 초가 되면 중국계 돌방무덤[石室墓]의 영향을 받아 퉁거우현[通溝縣]에서도 돌무지무덤의 중심부에 널길[羨道]이 달린 돌방[石室]을 만들게 된다.
일부 지배계층의 돌무지무덤에 있는 장대한 돌방은 쌍실(雙室)로 만든 것이 많은데, 이것은 부부(夫婦)합장인 것으로, 그 대표적인 예로는 장군총(將軍塚) ·태왕릉(太王陵) ·천추총(千秋塚) 등이 있다. 이들 돌무지무덤은 5세기 전반 평양천도(平壤遷都) 이후 차츰 쇠퇴하여 자취를 감추었다. 한편, 한강 유역에서도 돌무지무덤이 나오는데, 이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백제 때의 것으로 초기 백제의 지배세력이 사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강 지역에서는 무기단식이 보이지 않는데, 이것은 기단식을 축조할 시기에 고구려 세력이 이주해 왔거나, 아니면 하천 근처에 있던 무기단식 돌무지무덤이 모두 물에 의해 없어진 때문일 것이다. 백제의 돌무지무덤의 특징은 고구려 재래식 무덤형태로 얕은 대지 위에 네모난 돌무지를 층층이 쌓아올리고 가운데 주검을 넣은 형식으로, 제일 아래 단(段)의 네 변에는 돌이 무너지지 않도록 버팀돌을 설치하였는데, 1변이 50 m가 넘는 것도 있다.
석촌동 3호분은 크게 파괴되었지만 1974년, 83년, 84년의 발굴에 의하면 동서 55.5 m(불확실), 남북 43.7 m의 대형 돌무지무덤으로 제1단은 가에 큼직한 판석을 놓고 그 위에 작은 판석을 한두 겹 얹고 그 안쪽에 크고 작은 막돌을 메운 것이다. 4호분의 경우는 3단의 기단식돌무지무덤으로 위에 돌방과 형식상의 널길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돌방무덤 이전의 단계로 돌무지무덤으로서는 가장 발전된 단계이며, 환인현 고력묘자(高力墓子) 제11호분과 아주 비슷하다. 그 연대는 모두 4,5세기 정도로 여겨진다.
한편, 냇돌을 쓴 고식(古式) 돌무지무덤이 한강 상류인 양평군 문호리, 춘천시 중도, 제천시 교리 ·도화리 등의 남한강 유역에서 보인다. 문호리의 것을 예로 들면 1변 약 10 m, 높이 2.7 m 정도의 네모무덤[方形墳]으로 강가에 냇돌을 깔고 아마 세 사람의 시체를 놓은 다음 직접 냇돌을 3단 피라미드형으로 쌓은 것으로, 고구려 돌무지무덤의 가장 오래 된 형식과 통한다. 이상과 같은 한강유역의 돌무지무덤들은 고구려 무덤일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으나, 압록강 ·대동강 지역과 한강 유역 사이가 돌무덤 분포상 단절되었으므로 역시 백제 초기의 백제고분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그곳에서 출토된 김해토기 ·철제무기, 퇴화된 민무늬토기편들로 보아 그 연대는 2, 3세기로 짐작되는데, 이 유적은 백제 초기인 한성도읍시대의 연구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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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라미드
피라미드는 4각형의 토대에 측면은 3각형을 이루며, 각 측면이 한 정점에서 만나 방추형을 이루도록, 돌이나 벽돌 등을 쌓아 만든 구조물로서, 주로 기념비적 성격을 지닌다. 경우에 따라 측면이 사다리꼴을 이루어 꼭대기가 평평한 것도 있으며, 측면이 계단 형식으로 이루어진 것도 있다. 여러 지역에서 여러 시대에 걸쳐 건조되었는데, 주로 이집트, 수단, 에티오피아, 메소포타미아, 동아시아, 멕시코, 남아메리카, 지중해 연안 지역 등 고대 문명권에서 발굴되었으며, 현재 발굴 중이거나 구조물의 흔적으로 추정되는 유적지만 발굴된 곳도 있다. 이 중 이집트, 멕시코, 남아메리카의 피라미드가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국왕, 왕비, 왕족 무덤의 한 형식으로서, 그 어원은 그리스어인 피라미스(pyramis)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피라미드를 ‘메르(mer)’라고 불렀으며, 아랍어로는 ‘아흐람(Ahram)’ 복수는 ‘아흐라마트(Ahramat)’이다. 이집트 피라미드로는 현재 80기(基)가 알려져 있으며, 이 중 대부분이 카이로 서쪽 아부 라와슈(Abu Rawash)에서 엘-라훈(el-Lahun)에 이르는 남북 약 90 km인 나일강 서안 사막에 점재해 있다. 그러나 많은 수가 붕괴되어 벽돌 혹은 돌로 이루어진 산의 형태만 갖추고 있거나, 심지어 흔적만 남아 있는 것도 있어, 옛날의 모습을 남기고 있는 것은 의외로 적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기자(Giza)의 쿠푸, 카프레, 멘카우레 파라오의 피라미드로 가장 규모가 크다.
피라미드에 대해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BC 5세기)의 《역사》 권2에 있다. 그는 이집트 기자(Giza)의 대(大)피라미드에 관하여 10만 명이 3개월 교대로 20년에 걸쳐 건조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중세의 기록도 다소 남아 있다. 근세에 이르러 천문대설 ·창고설 등 공상적 ·신비적인 해석도 가해졌으나, 학술적으로는 나폴레옹 원정 때 조사단에 의한 《이집트지(誌)》가 돋보인다. 19세기 말 이래 피트리, 보르하르트, 라이스너 등의 조사로 과학적 해명이 이루어졌다.
수단에는 나파타(Napata)와 메로에(Meroe)에도 피라미드가 있다. 전자는 BC 8~BC 7세기의 쿠시 왕조의 것으로 18기, 후자는 BC 3세기 이후 악숨 왕조의 것으로 추정되며 약 50기가 있다. 모두 분묘로 건축된 것이며, 사면각도가 아주 급한 것이 특징이다.
중남부 아메리카의 피라미드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중부 멕시코의 테오티우아칸(Teotihuacán)에 있는 태양 피라미드와 달 피라미드, 치첸이자(Chichen-Itza)에 있는 카스티요, 그밖에 안데스 산맥의 촌락에 남아 있는 잉카 문명과 치무 문명의 유적이다. 아메리카의 피라미드는 보통 흙으로 쌓아 표면에 돌을 입힌 것으로 전형적으로 계단식이며 꼭대기에 대좌나 신전을 올린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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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천년 전 고대 한국인들의 피라미드
내몽골, 만주, 북중국 지역에 가면 정체불명의 피라미드들이 수 없이 서 있다. 현재까지 밝혀진 것은 100개 이상이다. 평균 25 ~ 100 m 높이의 피라미드들이다. 그 중에는, 뉴욕의 엠파이어 스테이츠 빌딩과 맞먹는 300 m의 높이를 가진 것도 있다. ( 63 빌딩의 거의 2배 가까운 높이 ) 이집트의 기자 피라미드보다 거의 2.3배 정도 높고, 면적 또한 여의도보다 큰 거대한 건축물이다. 이런 것을 축조하기 위해서는, 고대의 기술로는 연인원 100만명이 소요된다고 한다.
최초의 발견은, 1945년에 인근을 비행하던 미국 수송기 조종사의 사진촬영과 보고서에 의해서이다. 그 이전까지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산으로 알고 있었다.
1963년에, 중국의 고고학자들은 이들 거대한 피라미드를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의 무덤으로 예상하고 발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73년에 실시된 고고학계의 탄소 연대 측정법에 의해, 그 거대한 피라미드는 진시황의 무덤보다 수 천년 앞서 만든것 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현재, 이들 유적들은 중국 공안 당국에 의해 철저하게 숨겨지고 있다. 학술적인 조사도 불가능하며 중국에 의한 연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독일의 고고학자인 `하우스돌프`씨는 피터 크랴샤 라는 친구와 함께 여행객으로 가장하고 평상시 잘 알고 지내던 중국의 시 관광부 장관과의 긴밀한 관계를 이용해 외국인 금지 구역으로 묶여있던 북중국 일대의 피라미드들을 몰래 사진으로 담는데 성공하였다.
그 후 중국 공안당국은 촬영사실을 알아내고 하우스돌프씨와 친구를 검거하여 카메라 및 필름 등을 압수하였으나, 다행히 촬영 직후 곧바로 모든 사진들을 독일로 보내, 서방세계에 북중국의 피라미드들을 알리는데 성공하였다. 세계역사를 다시 써야 하는 21세기 최고의 고고학 발견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미국과 유럽의 수 많은 서구의 고고학자들이 중국 정부에 발굴을 허가해 달라는 공문과 압력을 수차례 보냈다. 처음에는 중국정부에서는 북중국 및 만주땅에는 옛날부터 야만민족과 기마민족들이 살았던 곳이라 진보된 문명이 없다고 말하고 , 독일학자의 사진과 보고서는 조작된 것 이라고 발뺌 하였다. 하지만 야만민족이나 기마민족이 만들기에는 너무나도 정교하고 웅장하여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아무튼, 그런식으로 계속 발뺌해오던 중국정부에서는, 계속되는 서구학자들의 발굴요구 및 서구 케이블 TV에서 몰래 중국에 잡입하여 카메라로 찍어 서구사회에 방송하는 노력에 힘입어 , 최근에 중국의 일부학자들이 그 존재를 인정하고 아직 발굴기술과 유물 보존기술이 부족해 다음세대로 그 발굴을 연기하게 되었다는 말만 살짝 흘렸다고 한다. 그 발표와 함께 10년전부터 고구려의 역사를 중국역사에 편입시켜 자국학생에게 가르치고 전 세계에 고구려 역사가 중국역사라고 홍보하고 있는 중이다.
보시는 바와 같이, 북중국의 피라미드들은 위로갈수록 낮아지고 계단식 형태의 모양을 띄는 만주와 한반도에 널려있는 고구려의 무덤과 너무나도 똑같은 모양과 형태를 가지고 있다. 학계에서는 이러한 건축공법을 들여쌓기 공법이라고 부르며, 중국과 일본에는 찾아볼 수 없는 고구려 고유의 건축공법이라는데 의의를 다는 학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면, 이 5,000년 전에 이 지역에서 이런 문명을 가진 집단은 누구일까?
중국인인가? 아니다. 중국인은 황하 유역에서 농사짓고 청동기 만들고 있었다. 몽골인인가? 아니다. 몽골인들은 당시 존재도 없었다. 거란족? 오환족? 이들은 완전 유목민으로서, 정주 문명과 관계없다. 여진족? 이들도 유목민이다. 5,000년 전에 이 지역에 관계된 국가나 민족은 누구인가? 모든 역사책에는, 이 지역에 단군 조선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아직은 추측에 불과하며 충분한 조사와 연구가 이루어진 후에 밝혀질 일이다. 아무튼, 고구려 및 고조선 등과의 연관성은 배제하더라도, 중국이 이 유적들을 애써 감추고 있는 것은 석연치 않은 일이다.
중국 피라미드 발굴 - 故 장문구(張汶邱 )씨가 임종전 증언내용
" 1963년4월에 우리 고적발굴팀 36명은 당국으로부터, 진시황의 다른무덤으로 추정되는 유적을 조사해야하니 대기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출발전, 조사단장은 우리발굴단원들에게 이번 유적은 매우 중요하여 조사,발굴 내용을 외부에게 일체 누설하면 안되니 이점을 각별히 유념하기 바란다고 말하였고, 우리일행은 기차와 버스,트럭을 나누어타고 이틀만에 목적지인 넓은 평원지대에 도착하였는데 창밖으로 이집트 피라밋처럼 거대한 피라미드들이 많이있었고, 도착한 우리발굴단원들은 하나같이 모두 탄성을 질렀어요.
우리 중국에도 이런 피라밋이 있었구나! 하는 기쁨과 경이로움이 뒤섞여서 말이죠, 우리는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의 또다른 이 엄청난 유적을 발굴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조사단은 4팀으로 나뉘어져 이후 3일동안 피라미드의 가장 큰 순서대로 먼저 가운데 3개 피라미드를 지정하여 발굴하기 시작했습니다. 3곳다 거의 한 형태의 것이었는데 이중 양옆의 두곳보다는 가운데것이 대단했어요.거대 한 벽돌 피라밋 지하입구로 들어가자 약 3~5층으로 석실이 나뉘어져 있었고, 상층부 공간으로 들어갈수록 말과 마차를 그림으로 화려하게 조성된 벽화,그림,여러 문자(중국글 한국글등)들, 조각류 약 6200여점, 맷돌,절구,솥,그릇등 생활도구 1500여점, 배추김치(원래김치인 백김치) 동물의 뼈등 음식물 400여점, 청동검 활 금관(신라형) 칼,창등 장신구류등 부장품 7800여점, 상투머리를 한 정 중앙시신(진시황의 모습과 흡사했슴)등 14구과 호위상 3000여점등이 대량발견 되었습니다.우리는 난생처음보는 이러한 너무나도 엄청난 유물,유적에 대해 모두 하나같이 무엇에 홀린듯하였으며, 마치 외계인의 세계,외계인의 무덤을 발굴하고있는듯한 느낌들이었습니다.
저는 그 유물들을 확인하면서 목록을 작성하는 일을 했었는데, 작업 3일째되던날 대충 7할정도 파악,작성된 상황이었고 이날 오후쯤에 이를 당시 발굴 단장이던 모 교수에게 중간 보고하자 그분은 큰 한숨을 내쉬면서 이런말을 했어요, 이 유적은 우리 황하족유물이 아니라 조선인들의 유적이다...중화역사 이전의 조선문명이야! 라고 말하면서 큰일이다!..일단 당국에 보고 한 후에 다시 지시를 받아야 하니 지금까지 발굴을 모두 중단하고 유물들은 모두 그자리에 두고 일단,오늘은 그만 나가세!" 라고 말하여 모두 발굴을 중단한채 나와 숙소에 있게 되었는데, 그날 밤 발굴중단과 동시에 철수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우리 발굴단원들은 모두 의아하게 생각했으나 곧 그 유적이 우리의 유적이 아니기때문이라고 이해하였고 일행은 그곳에서 떠나기에 앞서 숙소에서 현지공안에게 이곳에서의 비밀을 지키겠다는 서약서를 작성 제출였고, 그렇게 돌아온 이후, 그 피리미드들에 관해 더이상 들은적은 없습니다. 그게 그 피라미드에 대한 저로써의 마지막이었고 제가 아는 다 입니다"
- 당시 발굴요원이었던 故 장문구(張汶邱 )씨의 임종전 증언 내용-
[출처: 블로그-인생과 삶의 빛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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