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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사

중국, 인류사 첫 ‘초거대 한민족 피라미드’ 400여개 은닉

중국, 인류사 첫 ‘초거대 한민족 피라미드’ 400여개 은닉

 

이을형의 ‘법과 정의’…한국의 상고사 찾기(18)-신시배달국사(神市倍達國史)(10)

 

▲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들어가며

 

중국 역사의 약점은 우리와는 대조적으로 역사의 빈약함이다. 중국은 상고사가 없는 나라다. 그들은 환국과 배달국시대 우리와 같은 역사가 없다. 이는 지금 대국이 된 중국이 역사에 대한 열등의식을 버리지 못하고 우리의 상고사를 자기들 역사에 제멋대로 맞추고 조작해서 억지로 만들어 가는 이유다.
배달국시대까지도 중화인(中華人)의 나라는 중원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삼황오제설(三皇五帝說)을 조작해 마치 상고시대 역사가 있었던 것 같이 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헌원 이전의 역사는 기록도 없다. 그들이 말하는 삼황오제도 우리의 역사다. 이미 전술한 바와 같이 중국의 삼황(三皇)이라는 수인씨(燧人氏), 복희(伏羲氏), 신농(神農-소전·少典의 아들)과 오제(五帝)라는 천황씨(天皇氏), 유소씨(有巢氏), 고시씨(高矢氏), 치우씨(蚩尤氏), 신지씨(神誌氏) 등이 바로 한민족의 역사인물들이다. 이외에 역사적 인물로 여왜(여와·女?), 소전(少典), 유망(楡罔), 소호(小昊) 반고(盤固), 헌원, 전욱(전頊), 제곡(帝?) 등도 마찬가지다.
요·순은 우리의 한민족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나라들은 우리 배달국 사람이기에 우리 선조들이다. 당시 또 나라가 있다고 해도 우리가 지배하거나 우리의 제후국이었다. 단군조선에 와서 우리는 고도의 문명국으로 부상했다. 이는 당시 법률이며 화폐가 발견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단군시대 우리 선조들은 태평성대를 누렸다. 한서지리지(漢書地理誌)에 ‘조선에는 도둑이 없어 문을 열고 잔다’는 기록이 있다. 죄에 대한 형벌제도도 명문화 했을 만큼 고도의 문명국이었다. 이 당시부터 가림토의 문자가 있었기에 기록이 가능했다. ‘한국은 성인(聖人)이 세운나라’라고 할 만큼 ‘홍익인간’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정신으로 그 축이 됐다. 지금도 홍익인간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인류의 정신이다.
우리는 천민(天民)의 자손으로 천손(天孫)을 자처하며 태고시대의 옛날부터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민족이었다.

그 제천의식은 높은 산 정상에서 행해졌고, 산이 없는 평야지대에서는 제천 단(祭天壇)을 쌓고 제사를 드렸다.

그 평야지대에 쌓은 제단이 바로 피라미드의 시작이다.

이 피리미드가 후에는 통치자 무덤으로 변화한 것을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인류의 문명은 4대문명으로 알려져 왔지만 요하에서 인류의 최초·최고 문명이 일어난 것으로 밝혀지면서 세계 고고학계는 문명의 역사를 다시 써야 하게 됐다. 요하문명(홍산문명)은 4대 문명보다 1000~2000년 앞선다. 따라서 홍산은 우리 선조들이 최고·최초로 일으켜 세계사를 주도했음을 상징하는 문명이다. 지금까지 인류 최초의 문명이라던 메소포타미아 문명도 우리 민족이 BC 3100년경 이곳으로 이동해 일으킨 것은 이제 상식이 되고 있다. 이에 대한 논문들이 그 연구결과를 동일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이집트의 피리미드도 요하문명을 일으킨 인종에 의해 나왔다는 사실이 학계에서 발표되고 있다. 예컨대,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의 요시무라(吉村) 교수는 “홍산문명을 일으킨 검은머리의 인종이 BC 3100년경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일으키고 수메르에서 귀화한 ‘임호테프’ 사람에 의해 BC 2700년 전 이집트 최초의 피라미드가 탄생됐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요시무라(吉村) 교수의 이 같은 고증은 지금까지 인류 최고의 문명이라고 알려졌던 수메르문명이 사실은 우리 한국의 배달문명을 이룩한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주해 만든 문명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이집트문명 역시 배달문명을 이룩한 사람들에 의해 처음 이뤄 졌다는 것이다. 이번 칼럼에서는 세계 5대문명과 피라미드의 이 같은 역사적 사실들을 고찰하고자 한다.
 
5(五)대 문명이 나온 역사적 배경과 시대적 상황

 

5대 문명이 우리 한민족 주도로 된 것을 식민사관의 사람들은 믿지 않고 있다. 하지만 우리 한민족인 기마민족이 문명의 발상지를 오고 가며 침입 내지 정복해서 이룬 것이 5대문명의 실체다. 역사의 기술(記述)은 대개 문명이 나온 배경을 농경이 대하유역(大河流域)에서 발달한데서 출발하고 있다. 이 일대에서 생산이 증대되고 인구가 증가해 통치체제가 갖추어지면서 실제로 문명이 일어났다. 그 당시 부족의 지배자도 출현해 부족국가가 왕조국가로 발전하며 5대 인류문명이 대하(大河)를 중심으로 발원했다. 그 중심에는 우리 한민족이 있었다.
우리가 5대문명에 관여했다.

메소포타미아문명, 이집트 문명도 우리가 주도했다는 것은 이미 기술한 그대로다. BC 6000년대부터 보리 등 농경민, 초원의 유목민, 산림의 수렵민 등이 공존하며 상호 필요한 물품을 교류하며 살았다. 티그리스·유프라테스 두 강의 유역은 토지가 비옥했으나 강우량이 적어 건조했기 때문에 지하수도, 제방, 저수지, 운하 등의 문명이 탄생하는 배경이 됐다. 필요한 물을 끌어 사용하는 관개(灌漑) 기술이 나오게 됐다.

이집트 나일 강은 여름마다 홍수로 물이 넘쳐 상류로부터 비옥한 흙이 운반됐기 때문에 보리농사가 발달하면서 많은 도시국가가 생겨났다. 인류는 샘족, 야벳족, 함족으로도 구분하는데 이집트에서는 함족에 의해 BC 3500년경부터 도시국가 형성돼 BC 3000경 통일왕조가 수립됐다. 이후 왕조는 몇 번이고 교체됐는데, 기마민족이 이곳까지 와서 농경지대에 침입하고 정복하는 일이 많았다. 나일계곡에 연한 농경지역에서 봉쇄적인 지형 때문에 특색 있는 문명을 낳았고 BC 525년 페르시아에게 통일 될 때까지 약 30왕조가 흥망성쇠를 거듭했다. 이 때문에 교통로, 교역로인 산림지대의 길, 초원의 길, 오아시스의 길 등이 넓혀졌다. 문화적으로는 태양력 측지술(測地術), 문자의 발명, 피라미드, 사자(死者)의 서(書) 등이 있다. 나일강의 범람을 통제·관리해 홍수의 피해를 막고 경작지를 확대했다. 이것이 이집트의 정치통일과 강대한 왕권의 출현에 중요한 바탕이 됐다.
메소포타미아는 이집트에 비해 개방적인 지형이다. 따라서 주위의 산악부에 상당히 유력한 유목민인 기마민족이 침입할 기회가 많았기 때문에 국가성립은 비교적 늦게 성립되고 국가의 흥망도 빈번했다. 반면 문화교류가 빈번해 앗시리아, 페르시아 등과 같이 오리엔트의 통일에 중심적 역할을 했다. 메소포타미아는 왕권이 강대해 계약의 관념이 발달했다. ‘함무라비법전’은 그것을 상징한다. 이 지역에서는 페르시아에 의한 통일과 전제국가 체제가 완성됐다. 문화적으로는 태음력, 육십진법을 비롯해 설형문자(楔形文字), 페니키아의 표음문자, 헤브라이 일신교 등을 낳았다. 인더스문명은 인더스 강 유역에서 농경을 넓혀 BC 2500년경부터 각지에 훌륭한 도시를 건설한다. 이곳에서는 청동기(靑銅器)가 사용돼 인더스 문자도 만들어진다. 그리고 앞서 문명을 일으킨 메소포타미아와도 교류가 있었다. 우리 한민족은 이곳까지 영향을 미치며 인더스문명을 일으켰다. 기마민족의 기동력은 놀라워 이곳 까지도 영향을 미쳤다.
황하문명 또한 우리 한민족이 일으킨 문명이다.

우리가 역사에서 중원(中原)이라는 곳이 바로 황하지역을 말하는 것인데, 우리 민족이 이곳에 먼저 선주(先住)했다. 그 당시 황하유역의 사바나 지대에서는 사람들이 수렵, 목축과 함께 보리, 조, 등의 농경을 발달시켰다. BC 1500~1200년경에는 우리 한민족이 주축이 된 여러 도시국가가 이곳에서 탄생된다. 그 중 은(殷)나라가 가장 대표적이다. 은(殷)나라는 우리 한민족이 세운 나라다. 서아시아 북방 유라시아의 우리 민족이 청동(靑銅)의 칼 등을 갖고 왔기 때문에 어느 민족국가보다 강력한 왕조를 건국할 수 있었다. 황하문명에서는 뛰어난 청동기와 한자의 시조가 되는 갑골문자(甲骨文字)도 나왔다. 갑골문자(甲骨文字)는 주자(呪者)가 귀갑(龜甲), 우골(牛骨) 등을 불에 태워 그 위에 정치적 결정이나 곡물의 풍작, 흉작을 점치는 행위 등을 기록한 것을 말한다. 당시의 은 왕(殷王)의 묘나 궁전도 발굴되고 있다. 은허(殷墟)가 바로 그것이다.

 
피라미드의 최고(最古)도 조선의 피라미드로 드러나

 

2000년 7월 3일 중국의 천진일보(天津日報)는 티베트 서쪽 끝에 돌로 쌓은 1백 개가 넘는 피리미드가 러시아 고고학 발굴단에 의해 발굴된 사실을 보도한다. 이집트에서 제일 큰 기제피라미드(Gizeh Pyramid BC 2613~2494, 146.5m)보다 2배 이상 큰(300m, BC,4000) 피라미드도 있었다. 이 피라미드들은 발굴에 참여한 중국인 학자도 언급했듯이 환국, 배달국시대의 지도자와 환웅의 것으로 추정 되고 있다. 그 증거로 5000년 전 중국 북부와 만주에 있었던 강력한 문명국가는 오로지 환국과 배달국밖에 없었다. 당시 몽골이나 흉노, 거란과 여진은 문명을 만들 능력이 없는 단순한 유목민들이었다고 학자들은 지적한다.
그런데 정작 그 주인인 우리는 역사에 대한 무지로 침묵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으니 말문이 막힌다. 1945년 우연한 계기로 중국 북쪽을 비행하던 미군수송기 조종사에 의해 촬영된 사진의 보고서에 의해 이 피라미드들은 최초로 세상에 알려졌다. 400여개의 거대한 하얀 피라미드가 중국 북쪽에 널려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독일의 고고학자 할트위그 하우스돌프(Hartwig Hausdorf)는 비밀리에 이들 피라미드를 촬영해 ‘White Pyramid’(하얀 피라미드)라는 책을 출판해 서방세계에 북 중국의 피라미드의 실체를 알렸다. 중국 정부는 이곳이 옛 중국의 영역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에 이 피라미드 사진과 보고서는 조작된 것이라고 이 조차 거짓말을 했으나 서구사회의 계속되는 압력과 방송 등으로 그 실체를 결국에는 인정한다.
1963년 발굴당시 중국의 고고학자들은 이 피라미드가 진시황(BC,259~210)의 무덤으로 예상하며 희망을 갖고 조심스럽게 발굴에 임했으나 고고학계의 탄소연대 측정 결과 약 BC 4000년 전에 돌로 축조된 환국과 고구려의 건축공법인 ‘들여쌓기 공법’인 것으로 드러났다. 피라미드들이 황하문명보다 2천년이 앞서고 진시황의 연대보다 수천 년 앞서 만들어진 한민족 고유의 공법으로 축조된 것이 밝혀짐에 따라 중국은 크게 당황했다. 돌로 쌓으며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계단식 모양의 전통적 축조공법으로 쌓은 하얀색 돌의 피라미드였기 때문이. 중국의 무덤은 돌이 아닌 흙으로 무덤을 만드는 종족이었기에 당혹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이 피라미드에서 쏟아져 나오는 유물은 우리 한민족의 것이었기에 중국은 이를 숨기기 위해 발굴을 중단했다. 나아가 중국은 지금까지도 한민족 관련의 유물들을 절대 비밀로 하기 위해 발굴에 참여한 자들에게 함구령을 내리는 야만성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우리 유물을 중국 것으로 둔갑시키기 위한 꼼수임은 두말을 나위도 없다. 무엇 때문에 인류의 유산인 고대유물을 독점하고 날조하려는 것인지 그 속내는 말을 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이곳의 발견으로 고고학계는 피라미드의 인류역사를 다시 써야 했다. 이를 증명하는 실화가 있다. 중국의 서안의 피라미드 발굴과학자인 장문구(張汶邱)의 발굴 실화가 그것이다. 그는 임종 전 ‘조선의 피라미드 중 최고(最古)는 티베트 피라미드다’라는 글에 이 같은 사실을 적시해 소개하고 있다. 장문구(張汶邱)의 발굴참여 비화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피라미드의 발굴상황에서 보는 중국의 옹졸함

 

1963년 4월 고적 발굴 팀 36명은 당국(중국)으로부터 ‘진시황의 다른 무덤으로 추정되는 유적을 조사해야 하니 대기하라. 이번 유적은 매우 중요하니 조사 발굴내용을 외부에 일절 누설하면 안 되니 이 점을 각별히 유의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장문구(張汶邱) 일행은 중국에도 이런 피라미드가 있었구나 하는 기쁨과 경이로움에 탄성을 올렸다. 발굴팀은 3일 동안 피라미드의 가장 큰 순서대로 발굴하기 시작 했다. 3곳 모두 한 형태였는데, 이 중 가운데 피라미드가 대단한 규모였다. 거대한 벽돌 피라미드 지하입구로 들어가자 약 3~5층으로 석실이 나뉘어져 있었고 상층부 공간으로 들어 갈수록 말과 마차의 그림으로 화려하게 조성된 벽화, 그림, 여러 문자(가림토 등)들이 나왔다. 또한 조각류 약 6200여점, 맷돌·절구 솥·그릇 등 생활도구 1500여점, 배추김치(백김치)·동물의 뼈 등 음식물 400여점, 청동검·활·금관(신라형)·칼·창과 장신구류 등 부장품 800여점, 투머리를 한 정 중앙시신(진시황의 모습과 흡사했음), 14구와 호위상 3000여점 등이 대량 발견됐다. 장문구(張汶邱 발굴 팀은 “난생 처음 보는 너무나도 엄청난 유물, 유적에 대해 모두 하나같이 무엇에 홀린 듯 했다. 마치 외계인의 무덤을 발굴하고 있는 듯 한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발굴팀은 이어 “작업 3일째 되던 날은 약 70% 정도가 파악·작성됐다. 이날 오후쯤에 발굴단장이던 모 교수에게 중간보고를 하자 그분은 큰 한숨을 쉬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공개했다.
“이 유적은 우리 화하족(옛 중국) 유물이 아니라 조선인들의 유적이다.

중화역사 이전의 조선의 문명이야!

큰일이다. 일단 당국에 보고한 후에 다시 지시를 받아야 하니 지금까지의 발굴을 모두 그 자리에 두고 일단 오늘은 그만 나가세.

그날 밤 발굴중단과 동시에 철수명령이 내려졌다”

발굴단원(장문구 발굴 팀)들은 숙소에서 현지 공안(公安)에게 비밀을 지키겠다는 ‘서약서’를 작성·제출했다. 그렇게 발굴팀이 철수한 후 그 피라미드에 관해 더 이상 알려진 내용이 없다. 장문구는 “이것이 중국의 피라미드에 대한 마지막이었고 내가 아는 전부다”고 임종 전 말했다. 중국은 이처럼 우리의 피라미드는 물론 역사 유적과 유물들까지도 숨기고 외부와 차단시키며 공표조차 제대로 않고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중국은 인류의 문명 역사마저 숨기며 자기들의 입맛에 맞게 역사를 조작하려는 속셈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이는 인류의 유산까지 도둑질 하겠다는 의도로 밖에 비춰지지 않는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중국에 대해 측은한 마음이 드는 것은 왜일까. 동정이 앞선다. 만주 집안(集安)의 피라미드나 중국 북부 함양의 피라미드군(群)과 티베트의 피라미드 모두는 제아무리 중국 것이라 말해도 그것을 그대로 들을 학자는 없다. 이 피라미드는 엄연히 우리의 피라미드로 당시 우리 한민족의 세운 국가영역에서 세워진 피라미드가 아니던가. 우리는 고대문명을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고대 피라미드 건조의 효시(嚆矢)가 되는 자랑스러운 역사를 갖고 있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상고사’,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제주도교육위원회 ‘耽羅文獻集’, 최진열 ‘대륙에 서다’, 한창건 ‘환국, 배달 조선사신론’, 한창호 ‘한국고대사 발굴’,한정호 ‘대조선 민족사’, 박찬희 ‘지구촌 인류를 구제할 법칙-홍익인간사상’, 日本 三省堂 ‘世界史の整理’, 酒井忠夫. 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외 다수 서책을 참고·인용했음을 밝힙니다>

 

 

한민족 첫 세계문명 증거들…쌀·토기·활자·로켓·조선

이을형의 ‘법과 정의’…한국의 상고사 찾기(19)-신시배달국사(神市倍達國史)(11)

 

들어가며

역사적 사실이나 경과를 파악하다보면 보다 정확한 역사를 이해할 수 있다. 지금 중국과 일본이 날조·조작하며 왜곡하는 잘못된 역사를 제대로 구분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의 감각을 회득(會得)해서 역사적 사고력을 배양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전술한 칼럼에서 필자는 원시사회의 인류역사에서 제일 먼저 자각한 우리 민족이 건설한 요하문명을 시작으로 황하문명까지 우리 한민족의 주도한 것을 살펴봤다.
이제 우리는 상고시대부터 중세에 이르기 까지 많은 사서(史書)가 거의 모두 없어졌기 때문에 어디서 자료를 찾느냐가 중요한 문제다. 이 같은 사료문제 때문에 식민사관의 학노들은 역사를 과학적으로 말한다며 일제가 황당무계하게 만든 역사만을 추종하고 있다. 그리고 불공정한 사대주의자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에 근거한다면서 상고사 고대사는 아예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단지 고구려가 국사 ‘유기’(留記) 100권을 편찬한 것이 1세기경이고 백제는 근초고왕(近肖古王)때(346~376) 고흥의 ‘백제서기’가 편찬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또 신라는 545년 거칠부가 ‘국사’를 편찬했고 고려는 ‘왕조실록’을 편찬했다는 기록들이 있을 뿐이다. 이 책들은 바른 전통과 자립정신 그리고 올바른 역사를 후손에게 전하고자 함이었다. 그런데 이 책들마저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김부식은 당시 있던 책들도 창고에 숨겨 놓고 우리 역사의 근간을 흐려놓았다. 이 같은 부류들이 오늘에도 우리 역사, 특히 상고사와 고대사를 연구도 하지 않은 채 정통을 주장하면서 혼탁하게 하고 있다.
고려에 와서는 몽골과 금(金)에 예속체제를 강요당한 정세에서 삼국사기를 편찬했다. ‘고려왕조 실록’ 역시 조선조로 바뀌던 혼란기에 분실·변작됐다. 조선조에 이르러서는 명나라를 본국으로 받드는 의존체제에다가 호(胡)와 왜(倭)의 장기간에 걸친 연속 침입으로 많은 사료와 문화재가 소실 또는 망실됐다. 이들이 훔쳐간 사료 또한 적지 않다. 한 예를 든다면 우리가 받은 931회의 외침 중 800여회가 일본의 침입이었다. 불과 40년 동안 591회의 왜구가 침입해 480여 곳의 사찰을 불 살르고 우리역사와 유물들을 약탈한 일도 있다. 이로 인해 우리 조상의 손으로 기록된 원형대로의 자주적 역사자료를 찾아보기 힘들다. 자주적인 사관과 중국경서에 대한 비판적 해설 까지도 유교를 어지럽히는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고 해서 정부의 억압과 당파 간의 견제를 받았다.
일제 강점기 중에는 일제의 의도에 따라 우리 역사가 절반이하로 잘려지고 강역도 좁혀지는 등 날조·조작이 극에 달했다. 오죽하면 조작된 역사마저도 말살될 뻔 했다. 우리의 역사지지(地誌), 사상 등에 관한 모든 서적을 초등교과서까지 거둬들여 없애버렸을 정도였다. 타국의 간섭 아래 눈치를 보아가며 본의 아닌 것을 남겨놓은 우리 조상들의 기록이 간간히 있을 뿐이다. 하지만 매우 거만한 외국의 불공정한 필법에 의해 그들의 감정에 맞도록 조작된 사료들이 남았다. 이들 사료들은 불확실하고 간접적인 자료인 이른바 외사(外史)들이다. 지금 이 외사가 우리 고대사의 주된 자료가 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역사를 제대로 찾기 어려운 것이다. 이번 칼럼에서는 원시사회에 우리민족이 문명을 발생하기 이전의 상황과 우리 한민족의 우수성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원시사회와 문명의 발생 전 상황

 

인류가 문자를 이용해 생활을 기록하게 된 것은 약 5000년 전 부터다. 문자발명 이전을 선사시대라 하는데, 이 시기 인류는 간단한 석기를 써서 수렵·채집생활을 했다. 이 기간은 유사시대의 100배 이상이 된다. 구석기시대의 정체(停滯)가 계속되는 홍적세(洪績世) 후기에 현재 인류가 나타났다. 홍적세(洪績世)의 초기부터 중기에 걸쳐 인류는 동굴이나 강가에 살면서 타제석기를 사용해 수렵·채집생활을 했다. 그런데 우리 한민족은 다른 민족과 비교할 때 너무 특이했다. 우리나라 상고시대와 고대시대에 관한 역사연구를 추적하면 할수록 우리가 얼마나 위대한 민족인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신석기시대가 되면 농경, 목축을 하며 문명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을 알 수 있고, 바로 우리 선조들이 그 중심에서 이끌었다. 리를 보면 한없는 자긍심과 자부심 그리고 한민족의 위대함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우리는 인류 최초로 금속기(金屬器) 문자를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형성과 국가발전상을 갖고 있는 민족이다. 우리 한민족은 요하문명을 발생시킨 것을 시작으로 메소포타미야 문명, 이집트문명, 인도문명, 황하문명을 발전시켰다. 이들 5대문명의 공통점은 대하유역(大河流域)의 비옥한 농경지역에서 우리 한민족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기후가 요하지역의 겨울추위를 제외하고는 모두 온대로부터 아열대지대에 걸쳐서 건조지대에서 문명이 발상했다는 점이다.
요하는 대륙성 기후의 땅이다. 그런데 우리 선조들은 이곳에서 인류최초의 요하문명을 발생시켰다. 이 위대한 요하문명의 일어난 경로를 보면 너무나 위대한 우리 선조임들을 거듭 알기에 자랍스럽다. 인류역사를 상고해 보면 인류의 특성은 ①불을 사용하고 ②도구를 제작하고 ③언어를 사용하며 ④직립보행을 하는 것 등이었다. 이러한 특성을 가진 인류가 출현한 것은 지질연대의 제3기말 경인 것으로 보고 있으나 현재 확인된 최고(最古)의 유물을 보면 홍적기(洪積期) 초기의 것이다. 홍적세의 초기부터 중기에 걸쳐 등장한 원인류(原人類), 구인류(舊人類)는 동굴이나 호반(湖畔)에 살았다. 이들은 타제석기(打製石器=구석기)를 사용해 렵·채집생활을 했다. 따라서 홍적세(洪績世) 후기 즈음에 현재의 인류가 나타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인류는 점차 진보해 석기 외에 골각기(骨角器)를 사용해 동굴회화(洞窟繪畵)를 그려서 남겼다. 홍적세 말기에서 충적세(?積世) 초기에 농경목축이 시작돼 인류는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는 기초를 굳히게 된다. 그 중심에 우리 한민족이 있었다.
우리가 역사연대를 말할 때 선사시대, 원사(原史)시대, 역사시대(BC 4000년)로 구분한다. 고고연대(考古年代)는 구석기시대, 신석기시대, 청동기(靑銅器)시대, 철기시대로 나눠서 볼 수 있다, 빙하기는 제1, 제2, 제3, 제4빙하기를 거쳐 후빙기(後氷期)로 나눠지고 있다. 또한 인류는 원인류(原人類), 직립원인(直立猿人), 북경인류(北京人類), 구인류(舊人類), 현생인류(現生人類=신인류), 현대인종 등으로 나눠졌으나 학자에 따라 또는 새로운 화석의 발견으로 인류연대가 바꿔지는 일이 종종 있다.
 
한민족의 바른 역사 제대로 찾아야

 

상고사를 연구할수록 인류문명과 문화발전에 거대한 업적을 남긴 민족이 바로 우리 한민족이라는 것을 결코 피해갈 수 없게 된다. 외침에 의해 수많은 역사자료가 말살되면서 우리의 상고시대와 고대역사가 신화로 전락돼 만신창이가 역사가 되기는 했다. 그러나 우리민족은 천민(天民=천손)의 자손으로 하늘에 제사하고 선조를 숭앙하며 거대한 제국의 상고시대를 거친 민족임이 드러나고 있는 중이다. 그 고유의 전통이 여기저기 면면히 이어져 온 것을 우리는 볼 수 있고 느낀다. 이 전통들은 민족과 함께 살아 민족을 가호하며 단결시켜 주는 구심점이 됐다. 다만 각 사서의 저자에 따라 그 표현방식이 불교적 혹은 선교적 색채를 띠고 있다.
예컨대 단군의 사적을 신화로 채색하고 수식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화속에 단군이 꾸며져서 생겨난 것이 아니고 단군의 사적을 신화로써 채색하고 수식했다. 그렇다면 신화 때문에 사적을 말살 할 것이 아니라 꾸며 놓은 신화적 요소를 조심스럽게 추려내고 본래의 역사적 사실을 밝혀 상징적으로 표현된 설화 속에서 바른 사실을 찾아내야 한다. 종교적 색채를 제하면 우리 역사가 드러난다는 점이다. 고려조에서는 몽골의 인왕백고좌(仁王百高座) 강회금지정책 아래서도 호국불교 신앙과 함께 단군정신을 고취했다. 또한 조선조에서는 유학을 숭상하는 정책 때문에 불교는 억압했지만 단군숭상 사상만은 유지해 단군과 고조선의 실재를 의심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일제강점 후 상고시대와 고대시대의 역사가 잘려지면서 식민사관의 교육으로 전락했다. 식민교육에서는 환국, 배달국, 단군조선의 고대 3조선은 물론 예맥(濊貊), 부여, 숙신(肅愼), 삼한, 가야(伽倻) 등 우리 한민족의 역사가 사정없이 말살됐다. 왜곡 또한 상상을 초월하게 이뤄졌다. 우리 한민족은 상고시대부터 강성해 요동과 산동반도는 물론 중국 중원을 장악했다. 요동, 산동반도, 한반도를 본거로 거대한 왕조를 이룬 것을 오늘날에는 모두 밝혀지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유라시아는 물론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에 까지 그 영향력을 미쳤다는 것도 밝혀지고 있다. 따라서 수도 또한 여러 곳에 두고 엄청난 국력을 과시했다. 이미 백두산과 평양이란 지명이 중국에도 많았던 것이 이를 반증한다. 이렇게 강성한 우리 한민족의 나라가 중국 통일을 이룬 중국이 강자가 되면서 이들에게 밀리기도 하고 살기 좋은 한반도로 이주하면서 수도를 여러 번 옮겼다. 이 과정에서 산하와 도시의 명칭을 요동, 산동반도, 중원 지역에 동일하게 만들어 놓았다. 우리는 옛 활동지역의 것은 잊어버리고 반도의 역사만을 알면서 지명의 혼란이 빚어지고 있다. 우리 한민족이 문화적 선도자였다는 것과 그 활동지역이 넓은 지역이었다는 것은 중국학자 서량지(徐亮之) 등 현대 중국학자들이 고대 한민족의 옛 지명을 찾아내면서 드러나고 있다.
 
한민족의 우수성이 증명되는 것들

 

우리 민족이 얼마나 우수한 가는 세계 최초로 공인(公認)된 것들을 살펴보면 안다. 우선 ①2만 년 전의 것으로 알려진 전남 장흥군 출토의 신석기 유물이다. 신석기보다 더 오래전인 구석기 유물도 경기도 연천에서 발굴되고 있다. 구석기 유물의 대표는 돌도끼, 신석기 유물의 대표는 마제(磨製)석기인데 중국의 황하문명은 신석기시대 후반에 일어난 문명이다. 두 번째로 ②쌀농사 역시 세계 처음으로 우리 민족이 시작했다. 1만5000년 전 충북 청원군 소로리에서 59톨의 볍씨가 출토 된 것은 방사선 탄소연대 측정결과 1만5000년 전후로 밝혀졌다. 이는 지금까지 중국 후난(湖南)성 출토 볍씨(1만2000년)보다 약 3000년이나 앞선 볍씨다. 중국의 쌀농사보다 더 앞선 것이다. 한국에서 중국, 세계 각 곳으로 전파된 것이다. 이에 대해서도 일본은 나카오(中尾佐助)의 신학설이라 하며 일본의 중학사회역사 책등에 기술해 최고(最古)의 농경이 동남아시아의 열대우림지대에서 시작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세 번째로 ③토기도 세계 최초다. 제주도 고산리(高山里)에서 출토된 토기는 1만 수천 년 전 것으로 기존에 세계최초라던 수메르문명 토기보다 수천 년이 빠른 것이다. 동이족의 문명이 황하문명보다 2000년 앞섰다는 또 하나의 증거다. 이것도 만주지방에서 출토됐다면 중국은 자기 것이라 우길 것이다. 네 번째로 ④배 만들기(造船) 역시 세계 최고(最古) 최초다. 8000 년 전 경남창녕군 부곡면 출토는 이집트 쿠푸왕 시대의 배보다 3400년 앞서고 일본의 이키리키(伊木力) 출토품보다 2000년 이상 앞선다. 세계전문가들이 와서 보고 이를 인정하고 있다. 다섯 번째로 ⑤고래잡이 또한 세계 최초로 우리 한민족이 시작했다. 8000년 전 경남 울주군 반구대 암각화는 영국 BBC 방송도 ‘한국이 고래잡이 최초’란 제목으로 방영하고 있는 것이다.
여섯 번째로 ⑥고인돌 및 천문세계도 최초다. 8000년 전 전남 화순군에 있는 고인돌을 비롯해 강화도 등 세계 고인돌의 절반 이상이 한반도에 몰려있다. 상·고대부터 배달문명이 존재했다는 요지부동의 증거이다. 일곱 번째로 ⑦빗살무늬토기가 세계 최초다. 8000년 전 강원도 양양군 출토의 빗살무늬토기는 한국에서 시작해서 시베리아,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중국의 빗살무늬토기는 탄소측정결과 이후에 만들어 진 것으로 밝혀졌다. 여덟 번째로 ⑧세계최초 자연화약 및 화포도 우리 민족이 처음으로 개발했다. 1376년 최무선(崔茂宣)이 개발한 화약은 중국이 먼저 발명했지만 최무선(崔茂宣)이 독자적으로 연구 끝에 자연화약을 자체개발하고 함선에 실어 발사하는 화포와 화통은 우리가 세계최초로 개발했다. 이 무기는 1380년 두 번에 걸쳐 침입한 왜구 620척의 선단(船團)을 진포·관음포 싸움에서 격파해 대승케 하는데 기여했다.
아홉 번째로 ⑨세계최초 금속활자는 1377년 직지심경(直旨心經)이다. 이 직지심경의 인쇄는 독일의 구텐베르크보다 무려 70년 앞선 것이다. 이는 우리 금속인쇄문화가 얼마나 앞선 것인가를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실제로 이를 본 세계인들은 크게 놀라워했다. 열 번째로 ⑩세계최초 로켓과 신기전도 개발했다. 신기전은 1448년 당시 한 번에 일백 발씩 발사되는 최첨단 비밀병기였다. 당시 두만강, 압록강 국경을 침입한 여진족들을 물리치는데 사용된 다연장로켓(9MRL)의 원조다. 열한 번째로 ⑪세계최초의 철갑선 개발이다. 이순신 장군은 7년간의 조일전쟁(임진왜란) 당시 철갑선인 거북선으로 일본군과 싸워 23전23승이라는 해전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다. 이 거북선은 태종실록(1413년)에 최초로 나타난다. 열두 번째로 ⑫앞서 칼럼에서 자세하기 기술한 피라미드의 건조 또한 세계 최고(最古)의 것이다.
이 외에도 현대에 와서는 줄기세포와 체세포 개발도 세계최초로 했다. 황우석 연구팀이 2004년 세계최초로 시도해 외국에서도 이에 관한 연구가 진척되고 있는 중이다. 줄기세포 기술이 질병치료에 기여하고 있는 것은 우리 민족의 우수성 및 창의력과 무관치 않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고대사를 생각한다’,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제주도교육위원회 ‘耽羅文獻集’, 최진열 ‘대륙에 서다’,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 한창건 ‘환국, 배달, 조선사신론’, 한창호 ‘한국고대사 발굴’, 한정호 ‘대조선 민족사’, 박찬희 ‘지구촌 인류를 구제할 법칙-홍익인간사상’, 日本 三省堂 ‘世界史の整理’, 酒井忠夫. 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永原慶二 監修 ‘絶對 中學社會歷史’ 외 다수의 서책을 참조·인용했음을 밝힙니다>

 



인류문명 발원 ‘한민족 농업언어’

 

이을형의 ‘법과 정의’…한국의 상고사 찾기(20)-신시배달국사(神市倍達國史)(12)

 

들어가며

 

일본의 역사왜곡은 과거 우리나라를 일시 강탈하고 괴롭혔던 자신들의 폭력을 합리화하고 다시 강탈·지배해야 한다는 것을 그들의 2세들에게 가르치기 위한 야만적이고 치졸한 행태다. 일본은 여전히 날조·왜곡된 거짓역사를 눈 하나 꿈적 않고 변조하는 작태를 벌이고 있다. 중국의 우리 고대사 말살 또한 역사를 도둑질 했다는 측면에서 보면 자신들의 영혼을 파는 씻을 수 없는 과오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도 국력을 앞세워 허황된 언어의 사술(詐術)로 역사를 날조하는 것을 더 이상 묵과 할 수 없다. 나아가 이를 용납해서도, 왜곡을 답습하게해서도 안 된다. 그런데 현재 우리교과서는 그들의 왜곡한 역사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하고 수치스러운 일이다.
역사적으로 봐도 우리가 중국과 일본에 선구자이며, 우리는 고대부터 중국 본토에 먼저 선주해 선진강대민족으로 그들을 지배하며 대륙에서 활동했다. 일본 역시 저급한 문화를 가졌었기 때문에 4세기부터 우리가 일본의 문화전반과 국가사회구성에 지대한 공덕이 있었음은 부인 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중국은 삼국시대에 와서 그들이 우리보다 우월한 문화를 갖기 시작했다. 일본에게는 우리가 대륙의 문화를 받아 들여서 이를 융합·발전시켜 전해주었다.
우리는 그들을 깨우쳐주고 농경이며 문화며 우리의 도움을 주고 선도했다. 가장 많은 우리의 도움을 받은 나라가 바로 일본이다. 일본은 이런 은혜를 잊고 망나니 같이 우리나라를 수시로 침입하며 온갖 수탈을 일삼아 왔다. 우리가 북한의 6.25남침까지 총 932회의 외침을 받았는데, 이 외침의 거의가 일본이었다. 왜의 외침은 사실 노략질 수준이라과 봐야 정확하다. 왜구의 노략질이 무려 800여회였다는 점이다. 예컨대 13세기인 1223년~1265년 사이 우리영토를 무수히 침범한 왜구는 14세기 들에 극에 달했다. 그 기록은 1350년~1391년 경인년(庚寅年) 이후 40년 동안에 무려 591회의 기록을 갔고 있는 것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더욱이 1392년~1555년 왜구의 출몰로 해안지대의 피해가 속출하자 조선조정은 울릉도 주민을 이주시켜 무인도화까지 한 역사를 갖고 있다. 일본 민족은 다른 외국에도 좋은 일을 한 적이 거의 없다. 명나라 초기 명제(明帝)가 일본에 왜구의 출몰이 심해 금지를 요구할 정도였다. 그러나 우리는 4세기부터 일본을 문명사회로 개화시키며 지배해온 역사를 숨길 수 없다. 우리가 중국과 일본을 고대시대부터 지배해 왔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우리가 그들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민족이 그들보다 우월했기 때문이었다. 이번 칼럼은 배달국의 문명을 일으키고 세계에 우리의 기상을 떨치고 난후 당시 유라시아는 물론 세계로 퍼져간 우리 선조들이 어떠했는지 등에 초점을 맞추어 그 당시 세계 상황을 살펴보고자 한다.
 
인류 5대문명·유라시아와 세계·대륙의 변화

 

인류의 5대 문명은 세계를 크게 변화시켰다. 종래 농경이나 목축이 먼저인 것은 우리 한민족에 의해서 일어났음을 앞서 칼럼에서 이미 기술했다. 상고시대부터 일어난 농경이나 목축은 우리 한민족, 특히 배달국에서 발원해 서아시아, 동남아시아, 인도,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 등으로 번져 나갔다. 보리와 조, 콩 등은 이 시대에도 심어서 거둬들였다. 거둬들인 콩으로 된장을 만든 것도 우리 민족이다. 일본의 나카오(中尾佐助)는 신학설이라 하며 일본의 ‘중학사회역사’ 책등에 ‘최고(最古)의 농경이 동남아시아의 열대우림지대에서 시작했다’고 하지만 아니다. 쌀농사며 농경을 시작하고 농기구를 만든 것은 우리 한민족이 처음이었다. 2001년 세계 500여명의 학자가 참가한 ‘제4회 국제 벼 유전학술회의’가 마닐라에서, 2003년 제5회 세계고고학대회가 워싱턴에서 각각 개최됐다. 이 행사들에서도 우리 한민족이 가장 먼저 ‘재배 벼’를 개발해 전 세계로 전파, 세계 쌀 문화가 시작된 사실을 발표했다. 이 발표로 지금까지 나온 여러 학설을 일거에 모두 잠재웠다.
이처럼 우리 한민족은 유라시아뿐만 아니라 세계문명과 문화, 쌀농사를 이끈 주인공이다. 당시 한민족은 메소포타미아까지 이동해 타민족이 교역을 생각지도 않을 때 놀라운 역할을 했다. 한민족은 메소포타미아가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각 대륙의 십자로에 위치해 있을 알고 교역로가 필요하다고 봤다. 이때부터 우리 선조들은 바다와 육지를 연결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세계 최초로 배를 건조하고 육지에서는 기마민족으로 활발한 기동력을 통해 어느 민족보다 일찍부터 교역에 나선 것이 우리 한민족이었다. 이 과정에서 아우르고 지배하며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이고, 그 결과가 상고시대의 유라시아 대제국이었다.
인류의 농경이 시작되고 요하문명이 전개된 이후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티그리스·유프라테스, 황하로 이어진 대하(大河)유역에서 발생한 5대문명은 세계를 변화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들 문명이 발생 후 BC 3000년~2001년간(이 기간을 전(前)3000년 기(紀)라 말한다) 많은 도시왕국이 생겨 서로 싸우는 속에서 메소포타미아의 통합이 진행되기도 했다. 바빌로니아 왕국이 BC 2000년 기(紀)경 탄생했다. 그리고 함무라비 왕(BC 1700년경) 때에 사회의 규범을 규정한 ‘함무라비법전’이 완성된다. 이집트에서는 BC 3000년 기(紀)에 도시국가가 통일왕국으로 성숙했다. 그 후 왕조는 몇 번이고 교체되고 기마민족의 정복왕조도 이때 이뤄졌다. 이집트는 내세의 신앙을 가져 사후의 부활을 믿고 ‘미라’를 만들었다. 왕은 신의 아들인 자(子)였다.
북서인도에서는 인더스문명으로 농경을 넓혀 각지에 훌륭한 도시가 형성됐다. BC 1500년 중앙아시아로부터 유목민이 서북인도에 침입해 선주민을 노예로 만들었다. BC 1000년경에는 갠지스 유역에 진출, 철기를 만들어 쌀농사를 넓혀 도시를 형성하고 ‘카스트’ 신분제도를 만들었다. 즉, 아리안인 사회에서는 신(神)에 봉사하는 승려(僧侶)를 비롯해 왕, 무사(武士)가 특권적 지위를 누리며 농·공·상업에 종사하는 평민과 선주민·노예 등을 지배했다. 황하유역에서도 BC 1500~1200경 각지에서 도시국가가 생겨나고 은(殷)이 가장 강성했다. 이 때 서아시아와 북방에 있던 우리 선조들이 청동의 칼등 무기를 가져다주었다. BC 11세기경에는 주(周)가 은(殷)을 넘어뜨리고 그 일족과 공신을 각지에 파견해 봉건제도로 나라를 다스렸다. 이어 기원전 4세기 기마민족의 침입이 계속되면서 제후들은 각지에서 나라를 세운다. 이들도 앞선 기마전술이나 철제무기를 적극적으로 들여와 철제농구를 보급하고 농업을 발달시켜 상업까지 번성시킨다. 우리는 이런 흐름의 중심에 있는 기마민족이었다.
 
진(秦)의 등장 전까지 중원은 우리의 지배하에 있었다

 

이 때 까지만 해도 유라시아 중원은 우리 한민족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문명과 문화를 주도한 민족이 한민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하족(華夏族) 등이 선진 한민족의 문물을 받아들였다. 이들 화하족의 인구증가는 큰 변화를 가져온다. 물론 화하족들의 농경은 한민족에 의해 시작됐다. 농경과 함께 야생동물을 가축화·목축화 하는 일도 시작했는데, 바로 우리가 화하족에게 이를 전수시켰다. 이러한 생업이 일어나면서 농경민, 유목민, 수렵민이 공존하고 서로 교류하게 되면서 이들에게도 큰 변화가 일어난다. 그것은 문명이 일어나고 지배자가 출현해서 국가가 서게 된 것이었다.
기원전 8세기 북방 기마민족의 침입이 잦아지자 주왕(周王)의 힘이 쇠해지고 제후(諸侯)들은 각지에서 나라를 세워 우리의 기마전술과 철제무기를 적극 받아들였다. 이를 통해 철제농구가 보급되면서 농업이 발달하고 상업이 번성하게 됐다. 그 결과 중국은 춘추전국시대를 맞이하게 되고, 이후 진시황(秦始皇)이 BC 221년 중원의 제국(諸國)을 통일한다. 진시황의 통일 이전까지 중국은 한민족의 지배하에 있었다. 우리는 중국뿐만 아니라 메소포타미아와 인더스강 및 황하유역 등에 왕조를 세워 대륙을 호령했다. 농경과 함께 일어난 목축을 토대로 한 우리의 문명과 문화는 국가형성에 큰 역할을 했다. 이 또한 일본의 한 학자는 농경의 발상지가 동남아시아, 인도, 아프리카, 아메리카라고 주장하면서 신학설 운운하며 왜곡하려 하고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이미 밝혀진 대로 1만5000년 전 재배볍씨의 발견(충북 소로리)으로 우리의 농업이 동북아시아에서 세계로 전파된 것이 입증됐다.
우리 선조들이 어떻게 해서 이렇게 유라시아와 세계로 문명의 기틀을 전파할 수 있었을까.

대빙하시대(BC 5만~2만5000년 전)에는 지구의 28%가 빙하에 뒤덮여 인간을 비롯한 지구상의 수많은 생명체가 얼어 죽을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 남부의 쇼베(Chauvet)동굴에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된 선사시대 동굴벽화(3만5000년 전)를 남겼던 인류와 다른 지역의 인류들은 혹독한 기후를 견뎌내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의 땅은 비교적 따뜻하고 다습한 기후가 유지된 천혜의 축복된 땅이었다. 그 증거의 하나로 충북 단양 금굴 유적지 한 곳에서는 20만 년 전 인류보다 훨씬 앞선 70만 년 전부터 후대까지 전시대에 걸친 유적들이 고루 발굴되고 있다. 공룡의 화석과 더불어 많은 발자국마저 발견되고 있는 것은 우리 땅이 빙하기를 이길 수 있었던 환경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한 2005년 제주도 서귀포시 상모리, 사계리(沙溪里)에서 2만여년 전의 호모사피엔스(Homo Sapience) 화석이 발견된 사실이다. 즉, 옷을 지어입고 언어를 구사하는 고도의 지능을 갖춘 인류가 지금의 우리 조상이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 사실은 KBS <역사스페셜-제주도 사람발자국 화석의 비밀>에서도 방영했다.

이렇게 이 땅에 우리 조상이 정착해 산 것은 일반적인 인류사의 시작(20만 년 전)을 넘어서는 훨씬 앞서고 빠른 것이었다. 당시 제주도는 해수면이 낮았기 때문에 여러 종류의 동물들이 오가며 살 수 있었고, 서해도 지금보다 해수면이 1백m 낮은 땅이었기 때문에(지상 60m) 당시 우리 조상들은 지금의 중국 땅을 걸어서 오갈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지리적 혜택이 영향을 주었다는 점이다.<과학 동아-2004년 4월호> 이것은 유럽과 시베리아 빙하가 녹아내리면서 전 세계 해수면이 100m 상승하기 전의 일이다. 인류의 조상은 과연 누구이며 그 인류는 어떻게 이동했는지 역사는 말한다.
 
인류의 조상과 인류의 이동역사 중심에 ‘동북아’

 

우리의 땅은 빙하기에 제주도와 육지가 거의 붙어 있었고 서해의 대륙붕(평균40m)이 전부 육지였다. 다시 말해 한반도와 만주, 그리고 현재의 중국이 같은 하나의 대륙이었다. 그 당시 이곳에 중국인은 없었고 우리 한민족만이 물가를 에워싸고 집단을 이루어 살았다. 이런 넓은 대륙은 1만5000년 전부터 빙하가 녹아내리면서 변했다. 우리 조상의 삶의 터전이었던 서해지역의 땅은 서서히 40m 수심의 대륙붕의 바다로 변했다. 전설의 섬으로 불려지는 이어도 또한 1만1000년 전인 빙하기 까지도 제주도와 연결돼 있었다.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민요로 불러지는 이어도는 해수면의 상승으로 지금의 대륙붕을 이루게 된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세계학자들에 의해서도 밝혀지고 있다. 호주 시드니 대학의 지질학자들도 ‘1만년 이전의 한반도 서남해지역이 빙하가 녹기 전에는 육지였다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빙하가 녹아내려 우리의 땅이 좁아지자 한국문명을 갖고 세계로 확대해 나간 것이다.
즉, 요하에서 시작한 요하문명(홍산문명, BC4500년~BC 3000년)은 메소포타미아문명(BC 3500년)을 거쳐 이집트문명(BC 3200~BC 343년), 인더스문명(BC 2600년~BC 1900년), 황하문명 BC 2000년), 그리스문명(BC 1100~BC,14년), 로마문명(BC 27~AD476년)으로 확산돼 갔다. 이는 인류의 문명루트다. 세계문명의 시원지(始原地)가 자랑스럽게도 우리의 땅이요, 우리나라 배달국시대이었다. 또한 놀라운 것은 2003년 3월과 4월에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과학 잡지 ‘사이언스’에는 인류사에 놀라운 논문이 게재된다. 그것은 ‘헬리코 파이로린 박테리아의 유전자로 추적한 인류이동’(3월7일자)과 ‘농업언어의 전파’(4월25일자)라는 논문이다.
 
1만년전 첫 인류이동·농업언어(문명) 한민족 입증

 

이 두 논문은 모두 ‘약 1만 년 전(1만2000년~8000년 전)에 동북아시아로부터 어떤 집단이 세계로 확장됐음을 가정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동북아시아에는 우리 한민족이 있었다. 쌀의 볍씨가 1만5000년 전에 발견됨으로 인해 우리의 농업과 언어가 동북아시아에서 세계로 전파된 것이 놀랍다. 아울러 헬리코 파이로린 박테리아의 동아시아 형(EA형) 원시유형자의 원형이 오로지 한국인에게서만 100% 독립적으로 발견되었다는 사실 또한 놀랍다. 스메르지역의 이라크인들(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비롯한 아메리카 인디언(마야, 잉카문명)에게서 변형된 동아시아(EA형) 원시유전자가 분포돼 있음을 밝힌 놀라운 연구 결과까지 나왔다. 두 연구는 모두 ‘한국인이 동아시아의 조상’으로서 전 세계로 확산됐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전 세계에 한국의 문명과 문화의 흔적이 수 없이 많이 있었던 것이고, 가축의 조상 또한 우리 것이 많다는 것이다. 예컨대 세계 개의 조상도 한국 개라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의 생물교과서는 개의 조상은 한국 개였음을 DNA를 통해 추정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다른 나라의 문명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우리가 주역으로 그 중심에 서있었기 때문이며, 우리보다 선진민족이 없었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1926~36년에 걸쳐서 북경 서남 약 50Km 교외의 주구점동굴(周口店洞窟)에서 수만 년 전의 북경인이 40체 이상 발견됐다. 이중 1933~34년에 발견된 인골은 고생인류(古生人類)의 원생인류(原生人類)로서 홍적세기 후기 5만 년 전에 활동하고 불을 사용해서 식물의 조리를 알고 수렵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북경인이 중국 한족(漢族)의 조선(祖先)이라고 하지만 이것 역시 중국인(화하족(華夏族)=동남아시아인)이 아니었다. 분명한 것은 인류문명의 시작과 이동이 우리 한민족에 의해서 시작되고 주도됐다는 사실이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 상고사’와 ‘단군을 찾아서’,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제주도교육위원회 ‘耽羅文獻集’, 최진열 ‘대륙에 서다’,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 한창건 ‘환국, 배달, 조선사신론’, 한창호 ‘한국고대사 발굴’, 한정호 ‘대조선 민족사’, 박찬희‘지구촌 인류를 구제할 법칙-홍익인간사상’, 日本 三省堂 ‘世界史の整理’, 酒井忠夫. 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永原慶二 監修 ‘絶對 中學社會歷史’ 외 다수의 서책을 참고하고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한민족, 서양보다 3700년 앞서 ‘지동설’ 입증했다

 

이을형의 ‘법과 정의’…한국의 상고사 찾기(21)-신시배달국사(神市倍達國史)(13)

 

들어가며

 

우리나라 사람들은 의외로 자기나라 역사를 안다고 하면서도 우리 역사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 중국과 일본의 잘못 조작된 날조의 역사는 말하면서 진작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와 선조들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다. 중국과 일본에 의해 철저히 파괴 된 정체성(停滯性) 속에서 우리 자신을 잃어버리고 있는데도 우리는 모른다. 나아가 우리가 얼마나 위대하고 자랑스러운 민족인 것을 모르고 사는 국민이 너무 많다. 이러한 한민족의 역사무지에 대해서 이를 보는 외국학자들이 한국 역사의 진수를 알려주는 역사의 진실은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고 있다. 우리가 1만년의 찬란한 역사를 가진 위대한 민족이면서도 아직도 우리 국민은 우리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니 안타깝다. 국경일이 되면 이야기 하는 사람들과 신문의 칼럼리스트 등에서도 드러나는 소위 역사를 안다는 전문가들의 무지함 또한 여전하다.
며칠 전 북한의 공격으로 천안함 장병의 장렬한 순국4주기를 맞았다. 그날 정부대표의 추도사에서도 5천년역사라는 말을 들었다. 필자는 피가 거꾸로 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아직도 일제가 조작·위조한 왜곡한 역사를 바른 역사인양 금과옥조로 알고 있으니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우리는 1만년이 넘는 위대한 역사를 가진 세계으뜸의 역사를 갖고 있으면서도 지도급인사까지 창피한 역사 무지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우리가 최초·최고의 인류문명을 일으킨 민족 아닌가. 고대 요하문명, 피라미드, 신석기 유물, 쌀농사, 토기, 배 만들기(造船), 고래잡이, 고인돌, 천문세계도, 빗살무늬토기, 자연화약과 화포, 금속활자, 신기전(로켓), 철갑선, 책력,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 등에서 보듯 우리는 5천년역사가 아니라 1만년이 넘는 역사란 것을 왜 모르는가.
필자의 명치대 선배이신 한갑수(韓甲洙) 선생은 군복무로 미국 공군 지휘 참모 대학에 입교했었다. 그 때 같은 입학생인 대만의 학자 서량지(徐亮之) 교수가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귀국 한민족은 중국보다 더 오래된 역사를 가진 위대한 민족으로서 문자를 창제한 민족인데 우리 중국인이 한민족의 역사가 기록된 포박자(抱朴子)를 감추고 중국역사로 조작하는 큰 잘못을 저질렀음으로 본인이 학자적 양심으로 중국인으로서 사죄하는 뜻으로 절을 하렵니다. 받아주십시오” 그는 이 말을 하고 한갑수 선생에게 넙죽 절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 1943년10월 초판)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4천 년 전 한족(漢族)이 중국 땅에 들어오기 전에 중원의 북부 및 남부를 이미 묘족이 점령해 경영하고 있었다. 한족이 중국에 들어 온 뒤에 점점 서로 더불어 접촉했다. 동이는 은(殷), 주(周) 이전은 물론 은나라 주나라 대에도 활동무대가 오늘날의 중국 산동, 하북, 발해연안, 하남 강소, 안휘, 호북지방, 요동반도, 조선반도 등 광대한 지역을 모두 포괄했다. 그 중에서도 ‘산동반도’가 그 중심지였다”
우리 민족의 활동무대가 바로 중국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5천년 역사 운운하고 있으니 그 역사무지가 하늘에 닿아있다.

이로 인해 우리 한민족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을 갖지 못하고 있는 인사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지난 100여년 일본의 침략역사에 의한 괴기(怪奇)한 일들로 정신이 마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너무 국가에 대한 애국심이나 역사를 모른 채 잊고 사는 자가 많음에 놀란다. 국가는 없고 자신만이 잘살면 그만이다고 하는 망국적인 행태가 매일 뉴스를 통해 접하게 되는데, 왜 이렇게까지 망가졌는지 실로 안타깝다. 이번 칼럼에서는 우리 선조들이 얼마나 위대한지, 그 실체를 ‘천문학’에서 찾아 찾아보고자 한다.

 
천문학의 시조도 우리한민족이다

 

지금까지 잘못 알려진 천문학에 대해 세계천문학회는 조선시대까지 2천년 이상 꾸준히 하늘의 천문관측이 이루어져 기록이 남아있는 국가는 우리나라와 중국뿐이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우리는 고대부터 하늘의 자손인 천민(天民=천손)으로서 하늘에 제사하면서도 동시에 천체에 대한 연구가 깊었다. 그것은 제사를 드리기 위해 마련한 고인돌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고인돌에 북두칠성과 많은 별을 새겨 놓은 것은 태고 때 환인시대부터 천문에 관심을 갖고 연구한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천문학도 우리 민족에 의해서 시작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전 서울 대 박창범교수는 그의 저서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에서 ‘서구의 천문관측역사가 기껏해야 300년인데 비해 우리 동이족 배달민족은 BC 5000년 전부터 시작했다. 북두칠성을 비롯해 카시오페아 등을 새긴 고인돌이 북한지역에서만도 약 200여개가 남아 있다’(1997.9.29 한국일보)고 발표했다. 그는 우리 천문학의 연구가 가장 오래됐음을 알리고 있다. 또한 대동강유역의 고인돌에서 별자리를 그린 ‘천문도’가 발견되고 평안남도 증산군 용덕리 10호 고인돌 덮개돌 겉면에는 11개 별자리 80여개의 별을 나타내고 있다. 별의 밝기에 따라 구멍의 크기도 각각 달리했고 중심부에는 북극성이 그려져 있다. 이 고인돌의 별자리를 측정해보니 무려 BC 2800~220년으로 지금부터 약 5000년 가까이에 이른다. 지금까지 세계천문학계에서 고대천문학의 원형(별자리의 원형)이라고 한 메소포타미아(바빌로니아)지역 토지경계비의 천문기록 1200보다 1800년이나 앞선다. 천문학의 시작도 우리 한민족에 의한 것임이 입증된다고 하겠다.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 세계 첫 천문도

 

중국과 일본은 이를 숨겼다.

이것도 중국의 경우는 한무제(漢武帝)시대 중국인이 서방의 세계와 접촉한 것이 태초원년(太初元年)에 행해진 역법개정(曆法改正) 운운하며, 이 무제의 역법(曆法)이 중국역법(曆法)의 기본이 됐다고 변조했다. 또한 일본 명치유신 이전의 역(歷) 즉, 구태음력(舊太陰曆)의 기본이 됐다고 요시가와 고지로(吉川幸次郞-경도대 교수)도 이와나미신서(岩波新書P214~5)에 버젓이 쓰고 있다. 참으로 못 말리는 행태다. 중국의 양심적역사학자인 서량지(徐亮之)는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에서 “책력을 만든 이는 희화자(羲和子)이다. 중국의 책력 법은 동이(東夷)에서 시작됐다. 그는 은나라 출신으로 동이의 조상이다. 동이가 책력을 만든 사실은 진실로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래서 세계천문학계에서도 가장 오래된 별자리 지도로 인정하고 있는 천문도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가 우리에게 있는 것은 우리가 천문학의 선구자로 결코 우연이 아님을 방증하고 있는 셈이다.

고구려의 석각천문도(石刻天文圖)를 기본으로 12개의 분야로 하늘을 나누고 그 안에 크기와 밝기에 따라 1460여개의 별을 새겨놓고 293개의 별자리를 그린 웅장한 천문도는 단지 하늘의 별자리를 옮겨놓은 것이 아니라 황도(黃道=해가 1년 동안 지나가는 길)의 경사가 24°(도)라는 사실과 춘분점과 추분점의 위치, 계절의 변화 등을 기록하고 있어 당시 고구려인의 천문학 수준이 최고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 우리 화폐 만원권 지폐 뒷면에 있는 별자리 그림 일부가 바로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다. 중국의 1247년 ‘순우천문도’보다 900년이 앞서고 서양 천문학사보다 1000년 이상 앞선 것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도다. 조선조에 와서 태조4년(1395)에 제작된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의 중앙부와 달리 고구려 시대의 천상열차분야지도는 바깥에 새겨진 별들을 보면 고구려 초기하늘의 별들로 작성됐고, 이 같은 고구려 천문도를 기본으로 태조 때의 천문도는 수정된 하늘의 별자리였음이 고등과학원(KIAS) 박창범 교수에 의해 밝혀졌다.
 
BC 2099년 고조선 5대 단군, 인류 최초 지동설 이론

 

고조선5대 단군인 구을(丘乙) 황제(BC2099) 때 황보덕이란 재상이 50여 년간 천체를 관측하고 구을(丘乙)단군에게 보고한 기록이 ‘환단고기’에 나온다. 북극성과 태양주위를 돌고 있는 행성으로 수성, 금성, 지구성, 화성 등 10개의 행성이름은 물론 인류최초의 ‘지동설’을 밝히고 있다. 이는 서양보다 3700년이나 앞선 것이다. 서양은 16세기에 와서야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1473~1543)가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고 지구가 태양주위를 돌고 있다. 지구는 태양주위를 도는 별에 지나지 않는다”고 발표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지동설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잘못된 우주관이기 때문이다.
서양은 조선 선조(1552)이전 까지도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인간은 그 중심에서 군림하는 존엄한 존재이며 달과 해위의 천상계는 영원한 신의 영역“이라는 잘못된 우주관을 갖고 있었을 뿐이다. 사물의 원리를 발견하는데 귀납법으로 도출시키는 그리스의 철학자이며 4대 성인의 한 사람인 소크라테스(BC,469~399)도 해와 달은 행성이 아닌 그들의 신으로 절대 숭배대상으로 여겼을 정도였다. 서양의 천문지식은 이처럼 우리에 미치지 못했다. ’단군세기‘에는 10대 단군인 노을(魯乙)황제 35년(을축년, BC1916)에 지금의 천문대인 감성대(監星臺)를 두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신라의 첨성대(瞻星臺)도 이 감성대에 근원을 두고 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지금 첨성대 별 관측소는 남아있어 이것이 세계최초라는 것은 우리의 자랑이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조선시대 일식 정확히 예측, 1년 시간도 현재와 1초 오차

 

또한 ‘단군세기’에는 고조선 제13세 흘달(屹達)단군(BC1782~1720)때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의 집결을 말하는 오성취루현상(무진50년)기록이 정확히 나와 있다. BC 1733년 7월 13일 그것이 사실이었음이 천문학자(박창범 교수)의 컴퓨터 시뮬레이션 결과에 의해서 밝혀졌다. 또한 박석재 천문위원, 이종호 과학저술가 등 많은 학자들의 연구로 고대시대부터 우리 조상의 천문학 발달이 어느 정도였나를 파악할 수 있게 됐다. 또한 삼국시대에 와서 극히 한정된 장소에서만 관측할 수 있다던 백제의 기록도 있다. 세계천문학계를 선도하는 박창범 교수는 잃어버린 우리 고대사를 되살리고 있는 환단고기(桓檀古記)의 일식기록을 현대 천문과학으로도 틀림이 없는 옳은 기록임을 증명하고 있다. 그의 저서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에서 백제의 일식 관측기록이 당시 백제영역인 현재 중국발해만 유역인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곳은 우리 백제의 중심지였다.
조선조에 와서는 세종29년 음력 8월 1일 오후 4시50분 27초에 일식이 시작돼 6시55분 53초에 끝났다고 정확히 예측한 것이 맞았다. 1년을 365일 5시간 48분 45초라고 계산해 놓음으로서 지금의 48분 46초에 비해 1초의 오차밖에 없다. 이를 오영수선생은 ‘이순지’에 밝혔다. 반면 우리보다 천문지식이 뒤진 중국의 ‘현현기경’ 같은 중국의 고전에는 1년이 360일로 나타나 있다. 이러한 까닭에 일본학자의 ‘세계천문학사’에는 당시 인류 역사상 가장 과학적이고 정확한 책력으로 세종 때 이순지(李純之)의 칠정력(七政曆)을 꼽고 책력서로는 ‘칠정산외편’을 들고 있다.
 
놀라운 관찰력과 과학성, 실생활에 적용

 

하늘의 자손임을 자처하는 지혜로운 우리 배달민족은 천문을 관찰해 농사의 풍년과 흉년을 가늠했다. 예컨대, 태양에 검은 흑점이 많아질수록 농작이나 삶에 영향을 주는 것을 서양의 갈릴레오보다 1000여년이나 앞서 정확히 예측했다. 또 옛 중국의 오로라(Aurora=極光) 기록은 292개인데 비해 우리는 국제적으로 알려진 것만 해도 711개에 이른다. 중국의 ‘한서’(漢書)와 ‘후한서’의 중국 한족의 일식기록의 실현율은 78%에 불과하지만 ‘삼국사기’ 초기 일식기록의 실현율은 무려 89%인 것으로 기록돼 있다. 중국은 일식기록도 우리의 천문기록을 베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들의 천문도 역시 우리의 천문도의 원형을 모사한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당나라는 고구려의 독자적인 천하관(天下觀)=고구려가 지구의 중심으로 보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우리의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의 석각원본을 수장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덕일 박사)마저 나올 정도다. 7세기말~8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보아지는 일본의 ‘기토라 고분에 그려진 별자리 벽화’가 일본 하늘의 별자리가 아닌 BC 3세기~AD 3세기의 고구려 하늘의 별자리인 점으로 미루어 볼 때도 우리 선조들은 고구려 이전에 이미 높은 수준의 천문학을 발전시켰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이 우리 한민족은 하늘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었기에 수차례의 수정을 거친 서양의 양력(BC46년 율리우스력, 歷)에 비해 훨씬 먼저인 2311년이나 앞서 BC2357년에 만들어졌지만 지금까지 백분의1의 오차도 없어 수정을 한 일이 없다. 이것은 우리가 만든 책력인 음력의 놀라운 과학성(정확성)과 실생활 적용성에 대해 경탄을 했던 세계적인 석학 자코모박사의 이야기다. 1994년 ‘한배달’에서 발간한 ‘천부경연구’의 편집후기에 이런 내용이 나오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최고 최초의 천문학 유물과 최고의 책력이 나온 것은 결코 하루아침에 우연히 이워진 것이 아닌 환인(桓因)의 상고시대, 환웅(桓雄) 고대시대, 단군(檀君)시대의 고조선을 잇는 ‘천민(天民)의 민족인 천손(天孫)으로서 태고 때부터 하늘에 감사하고 제사하며 천문을 연구해온 것이 바탕이 됐다. 그 천문지식이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조선에 이어져 내려온 것이었다. 중국의 명나라는 이러한 연구도 간섭했지만 세종대왕은 더욱더 천체연구에 매달려 농민의 농사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었다. 이 같이 우리가 천체연구의 선구자인 것을 세계가 다 인정하고 세계학자가 모두 경탄을 하는데 우리나라의 학자라고 자처하는 자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는 민족에 대한 죄악이다. 우리는 세계를 지배한 민족이다. 우리민족의 이러한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두뇌의 명석함은 물론이고 세계를 주도하는 능력이 어느 민족보다 뛰어남을 입증하는 것이다. 우리민족의 우수성과 창의력, 과학적 사고가 인류발전에 기여했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제주도교육위원회 ‘耽羅文獻集’, 최진열 ‘대륙에 서다’,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 한창건 ‘환국, 배달, 조선사신론’, 한창호 ‘한국고대사 발굴’, 한정호 ‘대조선 민족사’, 吉川幸次郞 ‘漢の武帝’, 稻垣泰彦·川村善二郞·村井益男·甘粕 健 共著 ‘日本史’ 외 다수서책을 참고·인용했음을 밝힙니다>

 

 

“지금의 중국이 한국, 현 중국은 본래 없었다”

 

이을형의 ‘법과 정의’…한국의 상고사 찾기(22)-신시배달국사(神市倍達國史)(14)

 

들어가며

 

한민족의 역사를 우리가 바로 정립하지 못하고 중국과 일본에 역사를 도둑맞고 왜곡당하는 것을 보는 구미학자와 중국, 일본의 양심적인학자들까지도 바른 한국 역사를 알려주는 역사의 진실은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우리의 역사가 1만년이 넘는데도 중국과 일본이 우리 역사를 날조하고 왜곡한 것을 어찌해서 한국의 강단사학자들은 자기나라의 역사를 폄훼하며 중국·일본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지 상식적으로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양심적인 외국학자들은 중국과 일본의 역사가 말도 되지 않을 만큼 왜곡됐음은 물론 우리가 유라시아와 중국의 중원은 물론 세계를 주도한 최초·최고의 시원국(始原國)인데도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에 의아해 한다.
중국과 일본은 상고사가 없는 나라다.

지금 중국과 일본의 상고사는 거짓되고 왜곡된 허구의 역사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진실을 아는 학자들은 상대적으로 우리를 나무라고 있다. 그들은 많은 연구를 통해 역사의 무지로 잠을 자고 있는 우리를 일 깨워 주지만 한국사학을 장악한 학노(學奴)들이 연구도 하지 않고 있음을 한탄하며 우리에게 역사를 바로 알려주려 하고 있다.

우리나라 상고사와 고대사를 깊이 연구한 이들 세계 여러 나라의 석학들은 한민족이 인류 최초·최고의 국가를 건국하고 인류에게 찬란한 문명을 꽃피운 시원국(始原國)임을 무감각한 한국인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그들은 중국과 일본은 없는 역사도 조작하고 우리 역사를 도둑질하기 위해 가진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는데도 우리나라 학자들은 어찌해서 그들의 수족노릇을 하는지 알 수 없다고 이구동성 지적하고 있다.

그들의 주장 요지는 한국의 일부 학자를 제외하고 주류를 이루는 식민반도사관의 강단파 학자들이 민족혼을 팔아먹는 것과 다름없는 영혼이 없는 노예가 돼 있는데 대해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중국과 일본은 노골적으로 역사전쟁을 일으키며 없는 사실도 만들고 연대를 고치며 지명을 고치고 지명사전을 내고 조작하고 있지만 우리는 방관만하며 안일하게 침묵을 하고 있다는 것에 그들은 안타까워하고 있다.
외국학자들의 주요 일침을 들어보자.

일본의 양심적 학자들은 ‘한민족은 931회의 외침을 능히 저항했다. 그 정신에 대해 경탄을 금치 못한다’고(臺灣, 香港, 韓國の 民族P115)했다. 러시아의 학자 유엔 푸틴, 소련의 학자 시로코고르프를 비롯해 중국의 서량지(徐亮之)·임어당(林語堂)·왕동령(王棟齡)·임해상(林惠祥)·양관(楊寬), 대만학자 노간(勞幹)·필장박(畢長樸), 일본학자 아고 기요히코(吾鄕淸彦)·가시마 노보루(鹿島 昇)·미와 요시로(三輪義熙)·미와 구니미쓰(三輪邦光)·마스모도 젠노스케(松本善之助)·요사다(吉田八郞), 미국의존 카터 코벨(Jon Carter Covell) 모자 등은 우리 한민족의 위대한 역사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작금의 한국은 어떠한가. 국토가 분열돼 민족투쟁에 단결하던 민족이 부자형제가 총을 겨누는 파국에 처해 있다. 우리 스스로 자민족을 비탄케 하며 타민족을 경탄케 한 역사를 잃었다. 지난날의 그 경탄은 어디서 나오고 그 비탄은 어디서 나왔는가. 우리는 한국을 다시 발견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예전에 왜 중국(中國)이라 했던가. 이번 칼럼에서는 이와 관련해 우리민족이 얼마나 위대한 민족인가 에 대해 좀 더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나라는 지구의 중심이라 자처해 중국이라고 했다

 

인류역사의 시원국인 우리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우리 조선(祖先)의 역사를 보면 바이칼 호수와 유라시아, 중국 천산 우랄 알타이 등 대륙에서 경제적·사회적 생활조건을 찾아 중원과 요동을 거쳐 마침내 동방 해 돋는 곳에 이동했다. 이를 본 중국인들은 양곡(暘谷)이라 칭했다. 양곡(暘谷)은 해 돋는 동방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천산 태백산에서 짐승과 날 새를 상대로 한 유목생활도 했고 해 돋는 동방인 오늘의 중국 산동성(山東省)에서 아침에 떠오르는 해돋이 해를 보고 즐겼다. 그리하여 해(日)의 신화를 갖고 나라이름을 조선(朝鮮)이라 칭하고 고려(高麗)라 했다. 조선은 조일(朝日)이 선명(鮮明)하다는 뜻이고, 고려는 천일(天日)같이 높다는 뜻이다.

우리 한민족은 인류최초로 농업을 일으킨 민족이면서 야생동물도 제일먼저 가축화 해 농축생활(農畜生活)을 열었다.

그 일례로 닭도 많이 양계(養鷄)했다. 그래서 닭(鷄)의 신화를 갖고 나라 이름을 계귀(鷄貴)라 칭하고, 계림(鷄林)이라고 했다.

또한 당시 지구상 다른데 없는 진단(震檀)이 생산됨으로 진단(震檀)을 존중했다. 진단(震檀)은 인삼(人蔘)의 별명이다. 인삼에서 신선사상이 발생해 신선국(神仙國)이라고도 했다.

우리 선조들은 특히 다른 민족이 인간을 발견치 못한 신학시대에 인간을 발견했다.

이를 본 중국인은 이(夷)라 칭했다. 이 이(夷)는 인(仁)하여 인간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다른 곳에 없는 고시(?矢), 석족(石鏃)을 발견하고 최초로 대궁(大弓)을 만들어 썼다. 이를 본 중국 고대인들은 다시 이(夷)라 칭했다. 이자(夷字)는 대궁(大弓) 이자(二字)로 구성되어 대궁(大弓)을 발견한 것을 가리킨 것이다. 또한 최초에 철을 발견하고 생산했다. 이를 본 고대 중국인은 철자(鐵字)를 金변에 夷字(金+夷)자(字)로 구성해 ‘金+夷’를 철이라고 하며 동이족이 철을 발견한 것을 표시했다.

우리나라는 이처럼 인류사상 최초로 문명을 일으키고 역사의 시원국(始原國)으로 인류사상 최초의 문화민족으로 발전해 최초의 강대국으로 떠올랐다.

우리 한민족은 인류의 대표라고 자처하면서 천신(天神)의 피를 받은 천민(天民)임을 천명하게 된다.

그리고 동이고략(東夷考略) 여직조(女直條)에 백두산의 호(湖)에서 동주(東珠, 진주의 일종)가 생산되는데, 귀한 자(者)는 직천금(直千金)이라고 했다. 연암집(燕巖集) 열하일기(熱河日記) 고려주(高麗珠)에 중국의 황제 황후가 동주를 보물로 간직했다고 쓰고 있을 정도다.

당시 지구상 다른 곳에 없는 진단(震檀)과 고시(?矢), 석족(石鏃), 동주(東珠)가 이 땅에서 생산됐다. 그것은 이 땅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자처할 수 있는 배경이었고, 실제로 우리나라를 ‘중국(中國)’이라고 칭했다.

중국(中國)이라는 명칭은 우리의 국명인데 지금의 중국은 우리나라의 역사를 훔친 데서 나온 것이다.

언제 중국이 있었는가.

오늘의 중국은 본래 없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권2-卷二 駕洛國記)에 수로왕(首露王)이 황천(皇天)의 명(命)을 받아 왕이 됐다고 하면서 가락국(駕洛國)을 ‘중국(中國)’ 이라고 칭했었다. 당시 가락국(駕洛國)도 중국에 있었다.

이 같이 우리 선조들은 중국의 원조다.

황천(皇天)의 명(命)과 결부된 중국(中國)은 세계의 중심지를 가리킨 것이다.

당시 중국인들은 우리나라를 군자국(君子國)이라 예찬하고 대국(大國), 구국(舊國)이라고 경외(敬畏)했다.

 
외래사상에 구걸하는 국내 학노(學奴)들

 

우리의 역사를 폄훼하는 식민반도사관의 학노들(學奴)의 공통된 것은 연구를 하지 않는데 있다. 그들은 철저히 일제가 심어놓은 논리만을 답습하며 사학의 주도권만 탐낸 채 현실에 안주하는 식민근성을 벗어던지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국가의 정체성(正體性)을 훼손하며 우리나라의 가치관 변질을 가속화시켰다. 그들의 국가와 민족 그리고 후손에 대한 범죄가 하늘에 닿고 있다. 독일은 프랑스 나폴레옹이 침략해오자 사세가 부득이 해 패퇴 할 때도 ‘역사와 사상은 잊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하는 학자와 사상가를 챙겼다. 오늘의 독일이 있는 바탕이다. 오늘 우리에게는 이러한 학자들이 너무나 적다.
조선조의 서생들이 원효사상(元曉思想), 퇴계사상(退溪思想), 실학사상(實學思想) 등 외래사상과 사대사상에 구걸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들의 외래사상, 사대사상(事大思想)에 구걸하는 것은 우리에게 고유한 사상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그 서생들도 신라에 화랑도(花郞道)가 있는 것을 부정치 못할 것이다. 삼국시대에 고유한 문화사상이 있는 것을 부정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고려시대에 고유한 문화사상이 계승·발전해 온 것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화랑도(花郞道)의 기반은 신선사상이다. 또 화랑도의 본질은 ‘인간사상’이다. 단군이 선인(仙人)이요 단군시대에 ‘홍익인간’이 제창됐기 때문이다. 즉, 단군시대에 화랑사상이 발아(發芽)됐다고 기록됐다. 그렇다면 단군시대에 고유한 문화사상이 있는 것을 부정 할 수 있겠는가.
화랑도의 화(花)는 단군시대에 싹이 트고 삼국시대에 꽃이 피고 고려시대에 그 꽃을 찬란하게 피웠지만 조선조에 그 꽃이 시든 것이다.

다시 말해 한국의 고유한 문화사상은 단군시대부터 조선조시대까지 5000여 년 동안 계승성쇠(盛衰)해 왔다. 5000여 년 동안 끊임없이 계승된 것은 그 사상에 깊은 철리(哲理)가 있고 튼튼한 생명력이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또한 삼국유사에 한민족(韓民族)은 천신(天神)의 피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고서(中國古書) 산해경(山海經)에도 ‘한민족은 천신의 양육을 받는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고서 독단(獨斷)도 ‘한민족은 천신(天神)과 지신(地神)의 피를 받았다’고 기록했다.

그러면 한국에 천신의 피를 받았다는 천민사상(天民思想)이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있겠는가.

중국 사기(史記)에는 한민족(韓民族)이 최초로 철을 발견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민족은 최초로 활자를 발명하고 세계 최고·최초인 요하문명을 일으켰다. 아울러 피라미드, 신석기 유물, 쌀농사, 토기, 배 만들기(造船), 고래잡이, 고인돌, 천문세계도, 빗살무늬토기, 자연화약과 화포, 금속활자, 신기전(로켓), 철갑선, 책력,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 등도 세계으뜸이다. 이들 모두가 우리 선조들이 발명하고 발견한 사실이 모두 판명됐다. 이를 보면 한국에 물질적 발명을 중시하는 중물사상(重物思想)이 있는 것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

인간사상, 천민사상, 중물사상 등 3대사상이 한민족의 고유한 문화사상이다.

이 문화사상이 경탄할 역사를 창조한 원동력이 됐다.

즉, 인간사상은 인화단결을 이룩하고 천민사상은 자존독립의 정신을 북돋고, 중물사상은 경이적인 기술을 발전시켰다. 이 사상들이 오늘에도 작용하고 있음을 망각할 수 있는 것인가. 경이적인 기술을 발견한 민족이 경탄할 역사를 창조할 것은 당연하다.

한국에 고유한 철학사상이 있다.

그러나 자기 발견에 맹안(盲眼)인 우리들이 이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러시아 학자 UM 푸틴의 안타까운 한탄

 

러시아의 저명한 학자로 우리나라 고대사를 깊이 연구한 UM 푸틴은 우리 한국인에 대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통렬한 반성을 촉구했다. 그의 참담하리만큼 한국국민과 사가(史家)들에게 한 말은 우리의 머리를 조아리게 한다. 그는 이렇게 통탄하며 말했다.
“지금 시원문명의 뿌리인 한국 옆에는 나쁜 나라들이 많다.

그 중에는 남의 역사마저 송두리째 가로채 자기역사라고 하는 나라가 있고, 제 땅이 아닌데도 제 땅이라고 우기며 잘못된 과거마저 반성 할 줄 모르는 미친 나라가 있다.

그런데 더 나쁘고 희한한 나라가 있다.

인류의 문명을 이룩했음에도 모든 문화를 서양이나 중국에서 빌어 왔다는 열등감에 빠져있는 나라다. 조상이 곰의 몸에서 나왔다고 생각해 진짜 곰을 만들어 놓고 숭상하는 나라다. 미련하고 더러운 곰에서 나왔다고 해서 스스로의 뿌리를 더럽다며 역사를 버리는 나라다.

다른 민족의 신화는 인정하고 시험까지 출제되지만 정작 제민족의 신화는 미신이라고 치부하며 모르는 사람이 허다한 나라다.

제뿌리마저도 송두리째 가로채가고 제 선조의 유산이 하루가 다르게 남의 유산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데도 눈감고 딴청하고 있는 나라다. 자신들의 땅을 이웃에서 자기 땅이라고 우기는데도 눈치를 살피는 나라다. 심지어 가엾은 정신대 여인들을 매춘부였다고 조롱하며 한국의 국격(國格) 자체를 무시하는데도 오히려 불행한 백성의 한(恨)을 외면하는 민간 위주의 외교를 해야 한다는 나라다.

역사학과 국문학과를 졸업하지 않은 이들이 오히려 역사를 바로 세우려고 발버둥치는 나라다”

 

“외국인들에 의해 제 역사를 알아가는 나라다.

 

광복 60년이 지나도록 신채호 선생 같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무국적으로 방치한 나라다.

독립군 대장 홍범도(洪範圖)를 타국 땅 청소부로 일하다 외롭게 죽게 했던 나라다.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힘들게 살고 있는데도 챙기지 않는 나라다.

상해임시정부의 환국을 방해하고 망명정부의 임원이 아닌 개인의 신분으로 쓸쓸히 귀국하게 했던 나라다.

 

백범 김구 선생을 대낮에 암살할 수 있었던 나라다.

그래서 독립 애국활동을 한 것을 숨겨야하고 일제하의 삶을 공공연히 그리워 할 수 있는 나라다.

친일매국노들이 오히려 권력과 부를 차지하고 있는 나라다.

그래서 안중근 의사나 김구선생을 테러리스트라 하고 유관순을 여자깡패라고 막말을 하는 일본을 방관하고 있는 나라다.

나라의 근본이며 생일인 개천절행사에 대통령이 참석하지 않고 국무총리를 보내 스스로 국격(國格)을 낮추는 나라다.

독립국가라면서 서양의 나이인 서기를 아무생각 없이 지금도 쓰고 있는 나라다.

왜 이 같은 결과들이 나왔는지 제나라의 정체성은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지 또 나라의 정통성은 있는 것인지 제대로 생각지 않는 나라다.

그러면서도 말은 많고 남만을 탓하는 나라다.

그리하여 외국의 학자들도 자신의 있는 역사와 문화마저 없다고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며 조롱하는 나라다”

 

‘역사는 참으로 시대의 증인이요, 진실의 등불이다’고 로마의 철학자이며 정치가인 키케로(Cicero)는 말했다.

우리는 이 시대의 증인노릇도 진실의 등불을 켜들지도 못하고 있다. 이는 비극중의 비극이다.

오늘 역사적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비참한 자화상이다. 역사는 사람들에게 과거에 대해 알려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미래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있게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위대한 역사를 창조한 선조들이 하늘에서 통곡할 일이다. ‘칼라일’은 “역사는 사가(史家)가 현명한 만큼 그리고 안식(眼識)과 기백(氣魄)을 타고 난 만큼 완전하다”고 말했다.

우리의 사가들은 현명한 안식과 기백을 타고 난 만큼 완전한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랫동안 잘못된 중화주의와 식민사관에 익숙해져 7천년간이나 세계를 지배했던 제국의 역사를 발로 차 버리는 오늘의 한국 사학계는 진실로 정상이 아니다.

 

피라미드, 고구려와 단군조선

 

함양지역(중국 섬서성)에 무수히 산재한 피라밋들,

 

서안(시안西安,장안長安)에서 3십여Km 떨어진 함양지역에서는 정체불명한 피라밋들이 수없이 많이 발견
되고 있다. 현재까지 새로 밝혀진 피라밋은 100여개 이상으로 평균높이가 25~100m에 이른다고 한다.

 

큰것은 저변길이가 300m 정도나 되며,이집트 쿠푸왕의 大피라밋보다 더 큰것도 있고. 제작시기도 이집트

보다 한 2천년 앞선다고 한다.  이런 거대 피라미드를 축조하려면 고대기술로 연인원 100만명 이상이 소요

된다고들 하는데...

 

 

Hartwig Hausdorf씨 촬영 피라미드군락 사진, 서안(장안) 서북방 함양 인근지역

 

 

 

 

   

할트위그 하우스돌프씨가 촬영한 피라밋들(북중국 함양지역) 

 

 

 

1990년 훨씬 이전부터 나무로 뒤덮인 피라미드(Hartwig Hausdorf 사진)

지켜야 할 귀중한 역사현장, 신성한 피라미드에 나무를 심어놓다니...!

 

 

 

 

 

피라미드에서 밭가는 중국농부.주민들은 피라미드에는 관심이 없다고 한다

 

 

복토를 해서 나무를 심었다. 나무가 자라면 뿌리를 내릴꺼고, 그러면 피라미드가 파괴되고....
지나인은  저들 조상묘가 아니니까 조림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적어도 화족의 묘는 아닐 것이다.

 

 

외국인들은 근처에 접근도 못한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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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최초 발견은 1945년에 인근을 비행하던 독일주둔 미국 수송기조종사의 사진촬영과 보고서에 의해서였고.

그 전까지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산으로 알고 있었다죠. 

이 거대한 피라미드들은 1973년에 실시된 고고학계의 탄소연대 측정법에 의해, 진시황무덤보다 수천년 앞서

만들어진 것임이 밝혀지게 되었죠.(약 5,6천년 전으로, 황하문명 이전)

 

현재, 이 유적들은 중국 공안당국이 숨겨서, 학술조사도 불가능하며 중국당국도 연구를 제대로 하지 않는 

답니다.  독일인 하우스돌프씨가 촬영한 피라미드 사진을 책으로 펴내어 서방세계에 북중국 피라미드를

알리게 됩니다.

 

세계역사를 다시 써야하는 고고학발견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미국과 유렵 고고학자들이 중국정부에

발굴을 허가해 달라는 메시지를 수차례 보냈죠. 

중국정부에서는 북중국 및 만주땅에는 옛날부터 야만민족과 기마민족들이 살았던 곳이라 진보된 문명이

없다고 말하고, 독일학자의 사진과 보고서는 조작이라고 발뺌하였습니다. 하지만 서구학자들의 발굴요구

및 서구 케이블TV에서 카메라로 찍어 서구사회에 방송하는 노력에 힘입어, 중국 일부학자들이 그 존재를

인정하고 "아직 발굴기술과 유물 보존기술이 부족해 다음세대로 발굴을 연기하게 되었다" 고 합니다.

 

이 북중국 피라미드들은 위로 갈수록 좁아지고 계단식 모양을 띄는 만주와 한반도에 널려있는 고구려

무덤과 똑같은 모양과 형태를 보이고 있지요. 학계에서는 이러한 건축공법을 [들여쌓기 공법]이라고

부르며, 중국과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고구려 고유의 건축공법이라는데 이의를 다는 학자는 없답니다. 

그러면 5천년전 이 지역에서 이런 문명을 가진 집단은 누구였을까? 중국인이었을까?  중국인은 황하유역

에서 농사짓고 있었다. 몽골인이었을까?  몽골인들은 당시 존재도 없었다. 거란족? 오환족? 이들은 

유목민으로서 정착문명과 관계없다. 여진족?  이들도 유목민이죠... 그러면

 


중국 서안지역의 피라미드에 관하

 

중국 서안지역의 피라미드는 서방세계에서 먼저 확인하여 그 내용을 공동으로 조사하고자 요구 하였지만 중국측은 거부하였습니다. 자국내의 유적을 공개하지 않는 것은 자국의 자유이므로 어쩔 수 없습니다.

 

중국측에서 유적의 공개를 거부하고 조사 내용을 공개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서안지역의 유적은 화하족이나 진시황의 진나라 유적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문제를 이렇게만 바라 볼 경우 우리는 서안지역의 피라미드를 그다지 주목할 이유가 없습니다. 서안지역은 한민족과 너무나 먼 거리이기 때문에 구태여 우리 문명과 관련도 없고 중국이 공개하기를 거부하고 있는 마당에 굳이 알고자 할 필요성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약간의 상상이 발동합니다.

중국 화하족과 진시황의 진나라 유적이 아닌 것은 확실한데, 도대체 그들을 제외 하고 서안지역 유적의 주인은 누가 될 수 있는지, 그 실체는 전혀 파악할 길이 없습니다.

 

물론, 환상적인 고조선설을 믿을 경우, 고조선의 문명이라고 말 할 수도 있겠지만,환상적인 고조선 설은 일부의 한국인을 제외하면 여전히 소설과 같은 이야기로 치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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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문제를 주목하고 고민하는 이유는 환상적인 고조선설을 믿어서라기보다는 자신의 유적이 아니라고 하여 나무를 심어버린 저 상황을 보고 화가 좀 났기 때문입니다.

 

 

피라미드의 주인은 고대왕국의 왕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은 유적입니다. 중원문명을 일이킨 족속은 동이족인데, 동이족의 원류문명이 홍산문화에서 태동하였을 가능성이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습니다. 또한 고조선문명은 홍산문화의 후예일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과연 홍산문화의 후예들이 서안지역의 피라미드를 유적의 주인이었을까?

여전히 확답할 길은 전혀 없습니다. 단지, 전혀 아니다라고 할 수는 없지 않겠냐는 의문을 가질뿐입니다.

 

서안지역의 피라미드 유적의 주인이 화하족과 진나라의 유적이 아닌 것이 확실한데, 그들을 제외하면 주변지역에서 주목할 문명은 홍산문화 뿐인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입니다.

 

혹시나 서안지역의 피라미드유적이 고조선의 문명이 맞다면 저 나무 따위는 우리손으로 뽑아내야 합니다.

중국의 한~~~>>족들은 저 문명의 주인이 누구인 줄 확실히 알고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발굴한 결과가 자신들의 역사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여 무조건 감추기만 하는 것은 대국의 처사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일부 한국인들은 서안지역의 유적을 발굴한 장문구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장문구가 실존인물인지, 누군가가 조작하고자 가공으로 내세운 인물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일부 한국인이 알고 있는 자료를 올려봅니다.


중국것은 최대 300미터 / 연대는 10,500년전 건설 추정
이집트 것은 최대 150미터 / 연대는 4,600년전 건설 추정

→ 그림을 클릭하시면 큰 그림으로 보실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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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안 유역에는 위성사진에 점들로 보이듯이 수백기의 피라미드가 있는데 일부는 파괴되었다는 소식...(아~) 
- 아직 확인해야될 사항이 많지만 무조건 부정하는 것도 경계해야...21세기는 과학시대...

운영자가 치우천자의 역사를 최초 공개하였을때 '미친O'이라 수많은 공격을 받은적 있지요. 
지금은 입장이 꺼꾸로 되었지만(그놈들 입을 재봉틀로 박아버려야^.^) 
서안 아래 피라미드도 상당한 이슈가 될 것입니다. 

우리역사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필연적인 결론에 도달할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
감추는 것도 곧 한계에 다다를 것입니다 

 

함양피라미드, 서안피라미드

 

중국 함양(Xianyang) 북동지역과 서안(장안) 동남지역에 산재한 동이족 피라밋들.

 

함양피라밋문화,앙소문화,홍산문화,서단산문화, 함양 大피라밋 밀집지역(환국,배달,단군조선?)

 

함양,서안(장안)인근 15~30Km 피라밋군락, 함양 大피라밋, 무릉(하얀피라밋?), 오리온피라밋

 

함양지역, 서안(고대 앙소문화)지역, 여산지역(병마용갱) 피라밋군락지,

 

 

함양지역 인공위성사진(Google Earth, 서안 서북 30km)

 

1)大피라미드(242m x 224m), 2)무릉(하얀피라밋? 234m), 3)피라밋(175m), 9)하우스돌프 사진()  

 

9번, 독일인 Hausdorf씨가 중국 함양지역에서 촬영, 세상에 처음 공개한 피라미드군락 사진.

 

 독일학자(Hartwig Hausdorf)가 촬영한 사진

                     좌표 34 22 29.08 N 108 42 04.36 E                          

  

외국사이트에서 사진판독하여 그린 배열도.           Hausdorf 사진의 현재모습. 위치는 함양 북쪽.

 

9번, 중소형 피라미드군 중에서, 그중 큰 피라밋(저변길이 약88m)  

 

 

2번 무릉(茂陵? 하얀피라미드?), 6번 피라밋(163m), 7번 피라밋(160m), 9번 하우스돌프 피라밋군

 

2번, 무릉(茂陵,서안 서북쪽 30Km), Hartwig Hausdorf 하얀피라미드(234x231m)

 

6번 피라밋(163m)

 

7번 피라밋(160m)

 

 

9번 피라밋(88m), 4번 피라밋(172m), 1번 大피라밋(242m), 8번 피라밋(131m), 3번 피라밋(175m)

 

4번 피라밋(저변 172m)

 

3번 피라밋(저변 175m)

 

8번 피라밋(저변 131m)

 

9번,4번, 우측위, 피라밋(저변 75m)

 

 

1번 大피라밋(242m),  8번 피라밋(131m),  3번 피라밋(175m),  5번 피라밋(170m),

 

사진을 클릭하면 원본크기로 보입니다.

1번 大피라밋, 함양지역에서 가장 큰 피라밋, 밑변(242m x 224m,구글어스 )

 

1번 大피라밋, 저변길이 242m x 224m, 함양 북부지역,  오른쪽, 중소형 피라밋 80m x 78m

 

5번, 함양피라밋(170m*168m) 서안(장안,시안 Xi'an)에서 20Km 북쪽 지역 

 

 

8번,3번 피라밋 우측 위에서 보이듯, 여기저기에 널려있는 30m~50m 소형피라밋들...()

 

함양지역, 상대적으로 소규모(저변길이 30m~50m) 피라미드 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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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주(周),한(漢),수(隋) 시대 왕릉이라고 명명(?)한 피라밋군, 과연,근거가 명확한지...?

 

11번, 170m 피라밋

 

12번, 158m 피라밋

 

13번, 153m 피라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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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장안) 동남지역에 있는 피라밋들.

 

서안 동남쪽 15Km, 앙소문화지역 피라밋군, 널리 알려진 오리온좌 모형과 대형피라밋,

 

1번, Banpocun(반파) 오리온좌 피라밋 배치모습,  2번,3번, Dizhai(적채) 피라밋,

 

7천년 전 유물이 다량 발굴된 앙소문화의 고대유적지.

중앙 왼쪽은 Banpocun(반파,반포)지역, 오른쪽은 Dizhai(적채;狄寨)지역,

 

1번,오리온좌 피라밋,  2번,175m 적채피라밋,  3번,152m 적채피라밋, 앙소문화 고대유적지

 

 

서안,동남 15km Banpocun(반파)지역,오리온좌 모형 피라밋

 

오리온좌 배치로 유명한 서안(장안) 반파 피라미드의 과거(左)와 현재(右)

 

오리온좌 피라밋군락,                                        오리온좌, 1번 168m, 2번 154m, 3번 80m,

 

최근에는 위장을 해놓아 좌표를 모르면 찾기가 어렵다. 상대적으로 조그마하게 보이는  피라밋들은 이미

파괴된 것 같다. 작은? 피라미드(30m~50m)가 얼마나 많았는지..?  이 서안피라미드(오리온좌)는 여러

정황상 적어도 5000년 이전 고조선유물이라는 설이 있다.

 

 

오리온좌 1번,168m 피라밋,

 

오리온좌 1번, 168m 기단식 피라밋, 중국당국이 명명한 두릉(杜陵), 서한(漢) 선제릉(宣帝陵?)

 


 

 

 

오리온좌 2번, 154m 피라밋,

 

오리온좌 2번, 154m 피라밋,  중국당국이 명명한 서한(漢) 선제비릉(宣帝妃陵?) [참고]

 

오리온좌 모형 피라밋군, 3번 80m, 4번 63m, 7번 50m,

 

오리온좌 3번, 저변 약80m 피라밋, 1번에 딸린 무덤,

 

오리온 4번, 저변 63m 피라밋

 

오리온 7번, 저변 50m 피라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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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번,3번, Dizhai(적채) 피라밋,

 

2번 피라밋, 저변길이 175m(진입로와 정문),  3번 피라밋, 저변길이 152m,

 

2번, 175m 적채피라밋, 깔끔하게 정리된 진입로와 정문(확대,左上),

 

2번, 175m 적채피라밋, 피라밋 중앙에 정상으로 오르는 길.....

 

2번, 175m 적채피라밋, 우측으로 진입로와 정문이 나 있다.

  

3번, 152m 적채피라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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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집안에 있는 피라미드들,

 

만주, 길림성 집안, 고구려 환도산성(丸都山城) 아래 피라밋군락,


만주 집안, 고구려 환도산성(丸都山城) 아래 피라밋군락,

 

참조[펌]만주에 고조선때 축조된 피라미드가 있다.

 

 

[펌] 실제로 엄청난 피라밋들이다. 피라미드는 이집트와 남미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중국에도 엄청나게 있다.

 

저 피라밋들은 아마도 고조선시대부터 고구려시대까지 수천년을 이어내려온 것으로 보인다. 즉 수천년 동안

만주와 중국대륙 북부는 실제적으로 동이족의 영토임을 말해주는 것이며, 동이족의 문명이 중국 황하문명

보다 훨씬 오래되었고 고도화된 것으로 보인다.

 

독일학자들이 계속적으로 피라미드 발굴을 요구하자, 중국정부측은 사진이 조작되었다고 거부하다가, 갑자기

고구려도 중국역사였다며 동북공정을 내밀고 있다. 결국 동북공정이 세상에 먹히면 저 피라미드들도

중국인이 세운 것이라고 둘러대며 세계에 공개할 것이다.

 

 

하루빨리 우리 고대사에 대한 전면적인 재조사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매국노 이병도가 이끌었던 강단사학자들의 농담따먹기식 역사교육은 필요없다.

 

도대체 저 피라미드를 중국인들이 왜 숨기는 것이냐. 5천년 전에 중국 북부에 어느나라가 저런 문명을

가질 수 있을까. 5천년 전이라면 황하문명의 시작으로 봐야 하므로 중국도 아니다. 중국인들이 숨기고

있는 것으로 봐서 저들도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바로 고조선이다. 5천년 전에 중국북부와 만주에 있었던 나라는 고조선밖에 없다. 도대체 우리는 고조선과

고구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저 피라미드를 보고 우리 고대사에 대한 연구와 인식이 완전 잘못

되었음을 느낀다. 지금이라도 전면적인 재조사가 필요할 때이다.

 

[펌]http://www-nozzang.seoprise.com/board/view.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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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http://blog.daum.net/sabul358/4399090 

하얀피라미드는 함양 북쪽에 있었다.

 

하우스돌프(Hartwig Hausdorf )의 저서 하얀피라미드(『Die Weisse Pyramide』)는 1994년 Georg Muller

출판사에서 발간된 이래 유럽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2002년에 3판을 찍었다.

 

하우스돌프는 3장, 75~81페이지에서 "하얀피리미드는 Shaanxi지방, 서안 남서쪽 약60 km인 QinLing-Shan

산악지대에 있는데, 300m가 넘는 중국과 전세계에서 가장 큰 피리미드다." 라 소개하면서, 문제의 사진

(Nr. 10, 11 12)을 96페이지에 싣고 있다.

 

 

하우스돌프의(Hartwig Hausdorf)의 하얀피라미드는 무릉(茂陵)이다.

 

독일학자 Hartwig Hausdorf 의 저서  "White Pyramid" 중 한 페이지

 

左下(10번)는 서안 남서쪽에 있는 것으로 2차 세계대전 말경에 한 미공군에 의해 찰영되었다고 하며,

右(11,12번)는 서안 근방에 있는 수많은 피리미드중 두개를 찍은 사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좌측은 위성사진이고, 우측은 구글어스(google earth)로 잡은 함양 인근지역이다.

주위가 조금 달라지긴 했어도 같은 장소가 분명하다.

 

 

좌측은 하우스돌프책자의 하얀피라미드 지형, 우측은 피라밋지역에서 찾은 비슷한 지형. 두 지형이 동일하다.

 

위 지도의 실제 지형이다.

 

"white pyramid" 영문 번역판에는 (It is found in Tibet - located  in the Qin Ling Shan mountains, about

100 km southwest of the city of Xi'an) 라 되어 있지만, 무언가 오류가 있다.

문장 중에 "Tibet - located" 는 "Tibet and located" 의 의미나 "티벳과 골짜기 사이"로 해석되고, 서안 북서쪽

100km지점의 진령산맥 골짜기에서 남동쪽으로 이해되어야 하지 않을까?

 

 

무릉(武陵)에 나무를 심기 전 모습

 

나무를 심은 무릉, 주위에 아무것도 없는 걸로 봐서,오래전 모습인 듯.

 

중국당국은 무릉(茂陵?)을 서한시대 무제(武帝)의 능이라 하며, 무릉박물관을 꾸며 공개하고 있다. 

 

무릉은 서안에서 30여km 떨어진 흥평현(興平縣)의 동북쪽 무릉촌(茂陵村, Maoling))에 위치한다. 

높이는 46.5m, 아랫부분은 동서 2백31m, 남북 2백34m로, 함양지역에 있는 서한시대 황제의 능 9개 중에서

가장 크다는데, 하우스돌프가 높이 300m라고 한 기록은 밑변길이의 오식일 것이다.

 

 

[펌] 1912년, 여행자 'Schroder'가 했다는 말이 생각나는데,

"과거에 피라미드는 돌로 명백하게 분할되어 덮였었다, 그러나 그 돌들은 사라졌다. 약간의 돌만이 바닥에

묻혀있다. 그옆은 크게 자연적 배수로가 생겼다. 그래서 돌이 무너지고 아래로 굴러 떨어진 것이다. 

농부들은 그 돌을 가져다 집을 수리하거나 하는데 사용했다. 지금은 나무와 관목으로 커버되어 거의 자연적인

언덕처럼 보인다. 우리는 피라미드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어떤 계단 또는 문도 발견할 수 없었다."

 

1963년 중국 고고학자 "장문구"가 했다는 말도 생각난다,

"많은 피라미드가 있었고 그중, 큰 순서대로 세개를 각각 발굴했다. 피라미드 중 가운데 것이 가장 컷다. 한민족

관련유물이 쏟아져나오자 발굴중단명령이 떨어졌고, 절대 비밀...." 장문구

 

무릉을 보고온 사람의 말을 빌자면,

한무제가 실제로 입었다는 금루옥의, 옥상, 옥장 등이 매장되었으나, 모두 도굴되어 현재 무덤 내에는 아무런

부장품이 남아있지 않다고 하고, 이런저런 것들을 모아서 곽거병묘 앞쪽에 위치한 무릉박물관에, 곽거병묘

에서 출토된 부장품과 같이 전시되고 있다고 한다.

 

무릉(茂陵),곽거병묘,무릉박물관

 

2번, 무릉 234m,  곽거병묘(4각형 중앙),  무릉박물관,  우측끝, 73m 피라밋, 

 

2번 무릉(한무제?) 동쪽위 무릉박물관, 곽거병묘(중앙), 옆에서 훼손되고 있는 피라밋(위청묘?)

 

윗그림을 보면 곽거병묘는 무릉보다 훨씬 규모가 작지만, 많은 신경을 써서 만들고 관리한다는 것이 눈에

보인다.

 

조그마한 곽거병묘, 옆에 그보다 훨씬 큰 이 피라밋(위청묘?)은 왜 방치할까?

 

 

한무제(?)릉을 보고 있자니 "어느날 저것이 뭉개지고 흔적조차 없어질 수도 있겠다" 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중국정부의 행태를 보면 말이다.

 

서안 '하얀 피라미드'를 둘러싼 여러 증언들은 최소한의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이고, 자랑을 해도 모자랄 이

피라미드형 고분유적에 대한 중국의 태도는 너무 이상할 정도가 아닌가?

결론은 "무(武)릉의 주인공이 한(漢)의 무제(武帝)가 아닐 가능성도 있다" 는 것이다

 

서안 피라미드의 진실 감추는 중국정부

 

"진시황의 다른무덤으로 추정되는 유적을 조사해야하니 대기하라"



 


 

 
[네티즌 역사칼럼] 중국 서안지역 피라미드 발굴에 참여한 중국인 故 장문구(張汶邱 )씨가 임종전 증언내용이다. 
 
"1963년4월에 우리 고적발굴팀 36명은 당국으로부터, 진시황의 다른무덤으로 추정되는 유적을 조사해야하니 대기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출발전, 조사단장은 우리발굴단원들에게 이번 유적은 매우 중요하여 조사,발굴 내용을 외부에게 일체 누설하면 안되니 이점을 각별히 유념하기 바란다고 말하였고, 우리일행은 기차와 버스,트럭을 나누어타고 이틀만에 목적지인 넓은 평원지대에 도착하였는데 창밖으로 이집트 피라밋처럼 거대한 피라미드들이 많이있었고, 도착한 우리발굴단원들은 하나같이 모두 탄성을 질렀어요. 우리 중국에도 이런 피라밋이 있었구나! 하는 기쁨과 경이로움이 뒤섞여서 말이죠, 우리는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의 또다른 이 엄청난 유적을 발굴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조사단은 4팀으로 나뉘어져 이후 3일동안 피라미드의 가장 큰 순서대로 먼저 가운데 3개 피라미드를 지정하여 발굴하기 시작했습니다. 3곳다 거의 한 형태의 것이었는데 이중 양옆의 두곳보다는 가운데것이 대단했어요.거대 한 벽돌 피라밋 지하입구로 들어가자 약 3~5층으로 석실이 나뉘어져 있었고, 상층부 공간으로 들어갈수록 말과 마차를 그림으로 화려하게 조성된 벽화, 그림, 여러 문자(중국글 한국글등)들, 조각류 약 6200여점, 맷돌, 절구, 솥, 그릇등 생활도구 1500여점, 배추김치(원래김치인 백김치) 동물의 뼈등 음식물 400여점, 청동검, 활, 금관(신라형),칼,창등 장신구류등 부장품 7800여점, 상투머리를 한 정 중앙시신(진시황의 모습과 흡사했슴)등 14구과 호위상 3000여점 등이 대량발견 되었습니다.
 
우리는 난생처음보는 이러한 너무나도 엄청난 유물, 유적에 대해 모두 하나같이 무엇에 홀린듯하였으며, 마치 외계인의 세계,외계인의 무덤을 발굴하고있는듯한 느낌들이었습니다.저는 그 유물들을 확인하면서 목록을 작성하는 일을 했었는데, 작업 3일째되던날 대충 7할정도 파악, 작성된 상황이었고 이날 오후쯤에 이를 당시 발굴 단장이던 모 교수에게 중간 보고하자 그분은 큰 한숨을 내쉬면서 이런말을 했어요, “이 유적은 우리 화하족유물이 아니라 조선인들의 유적이다...중화역사 이전의 조선문명이야! 라고 말하면서 큰일이다!.. 

 
일단 당국에 보고 한 후에 다시 지시를 받아야 하니 지금까지 발굴을 모두 중단하고 유물들은 모두 그자리에 두고 일단,오 늘은 그만 나가세!" 라고 말하여 모두 발굴을 중단한채 나와 숙소에 있게 되었는데, 그날 밤 발굴중단과 동시에 철수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우리 발굴단원들은 모두 의아하게 생각했으나 곧 그 유적이 우리의 유적이 아니기때문이라고 이해하였고 일행은 그곳에서 떠나기에 앞서 숙소에서 현지공안에게 이곳에서의 비밀을 지키겠다는 서약서를 작성 제출였고, 그렇게 돌아온 이후, 그 피리미드들에 관해 더이상 들은적은 없습니다. 그게 그 피라미드에 대한 저로써의 마지막이었고 제가 아는 다 입니다" 
 

▲ 독일 학자 Hartwig Hausdorf의 사진. 저 때 부터 위장을 했는데, 몇십년이 지난 지금 나무들이 얼마나 자랐으며, 뿌리를 얼마나 내렸을 까.    



 
故 장문구(張汶邱 )씨의 임종 전 증언내용처럼 
내몽골, 만주, 북중국 지역에 가면 정체불명의 피라미드들이 수 없이 서 있다. 현재까지 밝혀진 것은 100개 이상이다. 평균 25 ~ 100 m 높이의 피라미드들이다. 그 중에는, 뉴욕의 엠파이어 스테이츠 빌딩과 맞먹는 300 m의 높이를 가진 것도 있다. ( 63 빌딩의 거의 2배 가까운 높이 ) 이집트의 기자 피라미드보다 거의 2.3배 정도 높고, 면적 또한 여의도보다 큰 거대한 건축물이다. 이런 것을 축조하기 위해서는, 고대의 기술로는 연인원 100만명이 소요된다고 한다. 

최초의 발견은, 1945년에 인근을 비행하던 미국 수송기 조종사의 사진촬영과 보고서에 의해서이다. 그 이전까지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산으로 알고 있었다. 

1963년에, 중국의 고고학자들은 이들 거대한 피라미드를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의 무덤으로 예상하고 발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73년에 실시된 고고학계의 탄소 연대 측정법에 의해, 그 거대한 피라미드는 진시황의 무덤보다 수 천년 앞서 만든것 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현재, 이들 유적들은 중국 공안 당국에 의해 철저하게 숨겨지고 있다. 중국정부는 무엇이 두려워서 서안지역에 산재되어 있는 거대한 피라미드 무덤군들에 발굴과 촬영과 출입을 금지시키고 나무들을 심어서 진실을 은폐하려는 것일까? 그것은 고대 세계사의 주역이였던 동방족(동이족=한반도 사람들)의 실체를 감추려는데 있는 것이다. 그럼 무덤양식을 통해서 동방족의 역사적 실체를 자료들을 토대로 알아 보기로 하자.

 

한반도 고인돌 무덤의 위상
세계 고인돌 분포의 비중의 70%은 한반도지역에 분포되어 있으며,피라미드 무덤양식의 기원이 되는 남방식 고인돌(땅을 파서 시체를 묻는 다음 돌이나 흙을 덮는 방식으로 피라미드양식.홍산문명의 무덤양식과 고구려의 적석총양식의 원형)은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한반도 남부지역에 집중 분포되어 있으며, 연대는 8천여 전의 무덤양식으로 한반도 사람들의 고유한 무덤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고인돌 무덤양식은 단군조선시대의 무덤양식이라기 보다는 단군조선이전부터 전해 내려온 만주와 한반도와 산동반도에 분포된 동방족의 고유한 무덤양식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분포지역이 한반도를 중심으로 만주와 산동반도,그리고 열본의 큐슈지역에 분포된 것으로 보아 고인돌문명의 중심지는 역시 서해가 바다가 되기전에 [마]문명의 중심지였다고 볼 수 있는 한반도 서남해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한반도 서남해 지역을 중심으로 콤파스를 그리면 둥근 원지역으로 만주와 한반도,그리고 산동반도와 일본열도가 들어온다. 그래서 피라미드.고구려 적석총.홍산무덤양식의 원형이 되는 남방식 고인돌무덤양식의 주인들 또한 한반도 서남해지역의 [마]문명인들이라고 할 수 있으며, 서남해 섬들에도 고인돌 무덤들이 많이 산재한 이유가 될 것이다. 서해가 바다가 되면서 육지로 이동하게 되었는데, 호남지역에 남방식 고인돌무덤들이 집중 산재해 있는 것으로 보아 서남해 지역에서 가까운 호남지역으로 집중 이동한 것으로 보이며, 점점 북으로 이동하여 만주와 연해주를 중심으로 다시 유라시아와 아메리카로 이동한 동방족(한반도사람들)이 피라미드와 적석총 무덤양식으로 대변되는 환국문명.홍산문명.슈메르.이집트.마야.아즈텍 문명의 주인들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은 과학적 증명을 토대로 하는 고고학.유전학을 통하여 증명되고 있다.
 
예컨대, 이집 트 피라미드의 주역들도 고대 한반도 사람들이 부적으로 사용한 3마리 물고기 문양을 제사그릇에 표기하여 사용한 한국인들임이 밝혀졌다. 그리스.이집트.히브리.인더스문명 등 서양문명의 기원민족이 되는 슈메르인들도 언어와 풍습과 문자.천문내용이 고대 한국인들과 동일한 동방족임이 밝혀졌으며, 지금의 서양언어(인도-유럽어족) 또한 그 조상어가 아리안족이 사용했던 고대 인도의 고급언어로써 불교범어로 사용된 산스크리트어인데, 이 고급언어라는 산스크리트어가 고대 한국어라는 사실이 증명되었으니, 과히 고대에는 한반도와 만주에서 터를 잡고 살았던 우리 동방족의 독무대였음이 명확히 입증된 셈이다. 그래서 "빛(문명)은 동방(한반도)에서!"라는 로마의 격언이 나온 것이며, "동방의 등불 코리아"라는 인도시성 타고르의 시어가 나온 것이다.

 

▲ 북중국의 피라밋으로 역시 독일 학자의 사진 .최근 사진 자료들은 없다. 외국인들은 근처에 접근도 못한답니다.한때 진시황 한때 진시황의 유적으로 보고 발굴하다가 몇일만에 발굴을 중단했다는 곳으로 사료된다.   


고인돌무덤

청동기시대의 무덤양식으로는 고인돌·돌널무덤·독무덤[甕棺墓]·움무덤[土壙墓] 등이 새로 들어와 초기철기시대까지 그 전통이 이어졌다. 고인돌은 선사시대 유적 중 가장 특징적인 성격을 가진 것으로, 제주도를 포함한 한반도 전역과 일본 규슈[九州], 중국 랴오둥반도 등에 퍼져 있으나 한반도에 가장 조밀하게 분포되고 있다. 서유럽의 고인돌과 비슷한 것도 있으나 이들과는 직접적인 관계는 없고,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과 한반도에서 독자적으로 발생한 무덤형식인 듯하다. 
 
고인돌은 주검의 위치에 따라 크게 두 가지 양식으로 나뉜다. 판돌[板石]로 땅 위에 네모난 방을 만들어 주검을 넣고 그 위에 크고 넓은 돌을 얹은 탁자식(卓子式) 또는 북방식(北方式)과, 땅 밑에 판돌 및 깬돌[割石]로 널을 만들어 주검을 넣은 뒤 굄돌[支石] 또는 돌무지 위에 덮개돌을 덮은 바둑판식[碁盤式] 또는 남방식이 있다. 
 
북한학계에서는 대표적인 출토지의 지명을 따라 전자를 오덕리형고인돌, 후자를 침촌리형고인돌이라고 부른다. 고인돌에는 민무늬토기·붉은간토기[丹陶磨硏土器]·반달돌칼·돌검·돌살촉이 묻혀 있는 것이 대부분이며, 비파형동검을 부장하는 경우도 있으나 대체로 청동제품은 발견된 예가 많지 않다. 
 
돌널무덤은 지하에 판돌 ·깬돌로 널[棺]을 만들고 판돌 및 나무판자로 뚜껑을 덮은 것으로, 대개 북방 시베리아 계통의 무덤 양식으로 보고 있다. 봉분(封墳)이 거의 보이지 않으며, 지역과 묻힌 자의 신분에 따라 형식과 껴묻거리의 양이 다르다. 여기에는 돌검·돌살촉·민무늬토기·붉은간토기·검은간토기·가지무늬[彩文]토기 등이 출토되며, 간혹 청동기도 함께 나온다. 
 
충남 일대에서 발견되는 돌널무덤은 깬돌로 널을 만들고 구덩이의 윗부분을 돌로 채우는 특이한 형식으로, 한국식동검을 비롯한 청동거울, 각종 의기(儀器), 덧띠[粘土帶]토기, 검은간토기 등이 출토되어 지역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부여·공주 일대에서는 이 시대의 독무덤도 나오는데, 바닥에 구멍을 뚫은 일상용 토기를 바로 세워 묻고 아가리를 판돌로 덮은 형식이다. 
 

▲ 티벳의 있는 이 피라미드는 제 4단군릉으로 알려져 있다.    


고구려의 돌무지무덤 [積石塚(적석총)] =한반도 남방식 고인돌

돌무지시설을 한 점에서 침촌리형(남방식) 고인돌과 공통되므로, 원래 고인돌인 무덤이 후대에 상석이 없어져 돌무지무덤으로 된 가능성도 있다. 청동기시대 초기의 것으로는 랴오둥반도[遼東半島] 일대의 장군산(將軍山) ·노철산(老鐵山) ·우가촌 타두무덤 등을 들 수 있다. 돌무지 밑의 묘광 배치는 중심적인 주체가 없고, 시설규모 또한 특별한 무덤이 없으며, 부장품에서도 서로 차이가 없다. 따라서 무덤의 피장자는 가족이거나 서로 밀접한 혈연관계가 있는 구성원으로 보인다. 이처럼 피장자 사이에 부장품 및 무덤시설의 차별이 없는 돌무지무덤은 남한지역에서도 보이는데, 한강 상류의 춘천시 천전리(泉田里) 돌무지무덤과 제주시 용담동(龍潭洞) 돌무지무덤 등이 있다. 이들 무덤에는 부장품으로 토기편과 석촉 등의 석기류 몇 점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무덤은 다음 시기에 이르면 많은 사람이 묻히고, 중심과 주변 무덤구덩이 간에 부장품과 무덤시설에서 차이가 나는 무덤으로 변하는데, 랴오둥반도 다롄시[大連市]의 강상(崗上)과 누상(樓上)무덤이 대표적이다. 강상무덤은 동서 28 m, 남북 20 m의 직사각형 묘역 안에 23기의 무덤이 있는데, 판돌로 정성들여 만든 7호무덤 주변으로 자갈로 거칠게 만든 22개의 무덤구덩이가 배치되었다. 그리고 이들 주변의 무덤에서는 140여 명이 한꺼번에 화장(火葬)된 채로 묻혀 있고, 누상무덤(동서 30 m, 남북 24 m)에서도 1 ·2호 돌덧널무덤 주위에 있는 10개의 돌덧널에서 화장된 많은 뼈가 나왔다. 부장품으로 비파형동검을 비롯한 마구류 ·수레부속 ·방패 ·활촉 ·도끼 ·끌과 각종 장신구가 나옴에 따라 북한학계에서는 이들 무덤을 수십 명의 노예를 순장한 노예소유자무덤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단계의 돌무지무덤은 이후 고구려와 백제 초기에 보이는 돌무지무덤으로 연결된다. 고구려는 건국 초부터 돌무지무덤을 조성하여 왔는데, 압록강의 지류인 훈강[渾江] 유역의 랴오닝성[遼寧省] 위안런현[桓仁縣]지방과 압록강 남안인 독로강(禿魯江) 유역의 시중군(時中郡) ·자성군(慈城郡) ·위원군(渭原郡) 등에 군집되어 있다. 초기에는 강가 모래바닥에 냇돌을 네모지게 깔고 널[棺]을 놓은 뒤 다시 냇돌을 덮는 정도의 간단한 구조였으나, 점차 냇돌 대신에 모난 깬돌[割石]을 써서 벽이 무너지지 않게 계단식(階段式)으로 쌓았으며, 돌무지의 외형은 대체로 방대형(方臺形)을 이룬다. 이것이 3세기 말~4세기 초가 되면 중국계 돌방무덤[石室墓]의 영향을 받아 퉁거우현[通溝縣]에서도 돌무지무덤의 중심부에 널길[羨道]이 달린 돌방[石室]을 만들게 된다.
 
일부 지배계층의 돌무지무덤에 있는 장대한 돌방은 쌍실(雙室)로 만든 것이 많은데, 이것은 부부(夫婦)합장인 것으로, 그 대표적인 예로는 장군총(將軍塚) ·태왕릉(太王陵) ·천추총(千秋塚) 등이 있다. 이들 돌무지무덤은 5세기 전반 평양천도(平壤遷都) 이후 차츰 쇠퇴하여 자취를 감추었다. 한편, 한강 유역에서도 돌무지무덤이 나오는데, 이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백제 때의 것으로 초기 백제의 지배세력이 사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강 지역에서는 무기단식이 보이지 않는데, 이것은 기단식을 축조할 시기에 고구려 세력이 이주해 왔거나, 아니면 하천 근처에 있던 무기단식 돌무지무덤이 모두 물에 의해 없어진 때문일 것이다. 백제의 돌무지무덤의 특징은 고구려 재래식 무덤형태로 얕은 대지 위에 네모난 돌무지를 층층이 쌓아올리고 가운데 주검을 넣은 형식으로, 제일 아래 단(段)의 네 변에는 돌이 무너지지 않도록 버팀돌을 설치하였는데, 1변이 50 m가 넘는 것도 있다. 

석촌동 3호분은 크게 파괴되었지만 1974년, 83년, 84년의 발굴에 의하면 동서 55.5 m(불확실), 남북 43.7 m의 대형 돌무지무덤으로 제1단은 가에 큼직한 판석을 놓고 그 위에 작은 판석을 한두 겹 얹고 그 안쪽에 크고 작은 막돌을 메운 것이다. 4호분의 경우는 3단의 기단식돌무지무덤으로 위에 돌방과 형식상의 널길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돌방무덤 이전의 단계로 돌무지무덤으로서는 가장 발전된 단계이며, 환인현 고력묘자(高力墓子) 제11호분과 아주 비슷하다. 그 연대는 모두 4,5세기 정도로 여겨진다. 
 
한편, 냇돌을 쓴 고식(古式) 돌무지무덤이 한강 상류인 양평군 문호리, 춘천시 중도, 제천시 교리 ·도화리 등의 남한강 유역에서 보인다. 문호리의 것을 예로 들면 1변 약 10 m, 높이 2.7 m 정도의 네모무덤[方形墳]으로 강가에 냇돌을 깔고 아마 세 사람의 시체를 놓은 다음 직접 냇돌을 3단 피라미드형으로 쌓은 것으로, 고구려 돌무지무덤의 가장 오래 된 형식과 통한다. 이상과 같은 한강유역의 돌무지무덤들은 고구려 무덤일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으나, 압록강 ·대동강 지역과 한강 유역 사이가 돌무덤 분포상 단절되었으므로 역시 백제 초기의 백제고분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그곳에서 출토된 김해토기 ·철제무기, 퇴화된 민무늬토기편들로 보아 그 연대는 2, 3세기로 짐작되는데, 이 유적은 백제 초기인 한성도읍시대의 연구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 이 피라미드에 복토를 해서 계단층을 없애고 나무를 심었다.나무가 자라게 되면 뿌리를 내릴꺼고, 그러면 피라미드가 파괴 된다고 한다.    


▲ 문제의 만주 집안 지역 피라미드.    


피라미드

피라미드는 4각형의 토대에 측면은 3각형을 이루며, 각 측면이 한 정점에서 만나 방추형을 이루도록, 돌이나 벽돌 등을 쌓아 만든 구조물로서, 주로 기념비적 성격을 지닌다. 경우에 따라 측면이 사다리꼴을 이루어 꼭대기가 평평한 것도 있으며, 측면이 계단 형식으로 이루어진 것도 있다. 여러 지역에서 여러 시대에 걸쳐 건조되었는데, 주로 이집트, 수단, 에티오피아, 메소포타미아, 동아시아, 멕시코, 남아메리카, 지중해 연안 지역 등 고대 문명권에서 발굴되었으며, 현재 발굴 중이거나 구조물의 흔적으로 추정되는 유적지만 발굴된 곳도 있다. 이 중 이집트, 멕시코, 남아메리카의 피라미드가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국왕, 왕비, 왕족 무덤의 한 형식으로서, 그 어원은 그리스어인 피라미스(pyramis)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피라미드를 ‘메르(mer)’라고 불렀으며, 아랍어로는 ‘아흐람(Ahram)’ 복수는 ‘아흐라마트(Ahramat)’이다. 이집트 피라미드로는 현재 80기(基)가 알려져 있으며, 이 중 대부분이 카이로 서쪽 아부 라와슈(Abu Rawash)에서 엘-라훈(el-Lahun)에 이르는 남북 약 90 km인 나일강 서안 사막에 점재해 있다. 그러나 많은 수가 붕괴되어 벽돌 혹은 돌로 이루어진 산의 형태만 갖추고 있거나, 심지어 흔적만 남아 있는 것도 있어, 옛날의 모습을 남기고 있는 것은 의외로 적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기자(Giza)의 쿠푸, 카프레, 멘카우레 파라오의 피라미드로 가장 규모가 크다. 

피라미드에 대해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BC 5세기)의 《역사》 권2에 있다. 그는 이집트 기자(Giza)의 대(大)피라미드에 관하여 10만 명이 3개월 교대로 20년에 걸쳐 건조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중세의 기록도 다소 남아 있다. 근세에 이르러 천문대설 ·창고설 등 공상적 ·신비적인 해석도 가해졌으나, 학술적으로는 나폴레옹 원정 때 조사단에 의한 《이집트지(誌)》가 돋보인다. 19세기 말 이래 피트리, 보르하르트, 라이스너 등의 조사로 과학적 해명이 이루어졌다. 
 
수단에는 나파타(Napata)와 메로에(Meroe)에도 피라미드가 있다. 전자는 BC 8~BC 7세기의 쿠시 왕조의 것으로 18기, 후자는 BC 3세기 이후 악숨 왕조의 것으로 추정되며  약 50기가 있다. 모두 분묘로 건축된 것이며, 사면각도가 아주 급한 것이 특징이다.
 
중남부 아메리카의 피라미드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중부 멕시코의 테오티우아칸(Teotihuacán)에 있는 태양 피라미드와 달 피라미드, 치첸이자(Chichen-Itza)에 있는 카스티요, 그밖에 안데스 산맥의 촌락에 남아 있는 잉카 문명과 치무 문명의 유적이다. 아메리카의 피라미드는 보통 흙으로 쌓아 표면에 돌을 입힌 것으로 전형적으로 계단식이며 꼭대기에 대좌나 신전을 올린 것이 특징이다. 
 

▲ 귀족 평민의 무덤이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고구려의 것이라고 하는데 더 이전의 것일수도 있다.

독일 학계에서 계속해서 공동 발굴을 하자고 중국에 제의했지만, 댐을 만든다는 이유로 수몰을 시켰다. 독일 학회에서 계속 항의하자 중국에서 수몰 전의 사진을 보내준 것이라고 한다.최근에는 물을 다시 뺐는데 저 모습 저 대로 있다고 한다.  최근 북한은 고구려가 한때 베이징까지 지배했었다는 학설을 내 놓았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학계(강단사학)는 관심을 별로 두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재야 사학계는 진실을 밝히려 애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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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천년 전 고대 한국인들의 피라미드
내몽골, 만주, 북중국 지역에 가면 정체불명의 피라미드들이 수 없이 서 있다. 현재까지 밝혀진 것은 100개 이상이다. 평균 25 ~ 100 m 높이의 피라미드들이다. 그 중에는, 뉴욕의 엠파이어 스테이츠 빌딩과 맞먹는 300 m의 높이를 가진 것도 있다. ( 63 빌딩의 거의 2배 가까운 높이 ) 이집트의 기자 피라미드보다 거의 2.3배 정도 높고, 면적 또한 여의도보다 큰 거대한 건축물이다. 이런 것을 축조하기 위해서는, 고대의 기술로는 연인원 100만명이 소요된다고 한다. 

최초의 발견은, 1945년에 인근을 비행하던 미국 수송기 조종사의 사진촬영과 보고서에 의해서이다. 그 이전까지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산으로 알고 있었다. 

1963년에, 중국의 고고학자들은 이들 거대한 피라미드를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의 무덤으로 예상하고 발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73년에 실시된 고고학계의 탄소 연대 측정법에 의해, 그 거대한 피라미드는 진시황의 무덤보다 수 천년 앞서 만든것 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현재, 이들 유적들은 중국 공안 당국에 의해 철저하게 숨겨지고 있다. 학술적인 조사도 불가능하며 중국에 의한 연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독일의 고고학자인 `하우스돌프`씨는 피터 크랴샤 라는 친구와 함께 여행객으로 가장하고 평상시 잘 알고 지내던 중국의 시 관광부 장관과의 긴밀한 관계를 이용해 외국인 금지 구역으로 묶여있던 북중국 일대의 피라미드들을 몰래 사진으로 담는데 성공하였다. 
 
그 후 중국 공안당국은 촬영사실을 알아내고 하우스돌프씨와 친구를 검거하여 카메라 및 필름 등을 압수하였으나, 다행히 촬영 직후 곧바로 모든 사진들을 독일로 보내, 서방세계에 북중국의 피라미드들을 알리는데 성공하였다. 세계역사를 다시 써야 하는 21세기 최고의 고고학 발견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미국과 유럽의 수 많은 서구의 고고학자들이 중국 정부에 발굴을 허가해 달라는 공문과 압력을 수차례 보냈다. 처음에는 중국정부에서는 북중국 및 만주땅에는 옛날부터 야만민족과 기마민족들이 살았던 곳이라 진보된 문명이 없다고 말하고 , 독일학자의 사진과 보고서는 조작된 것 이라고 발뺌 하였다. 하지만 야만민족이나 기마민족이 만들기에는 너무나도 정교하고 웅장하여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아무튼, 그런식으로 계속 발뺌해오던 중국정부에서는, 계속되는 서구학자들의 발굴요구 및 서구 케이블 TV에서 몰래 중국에 잡입하여 카메라로 찍어 서구사회에 방송하는 노력에 힘입어 , 최근에 중국의 일부학자들이 그 존재를 인정하고 아직 발굴기술과 유물 보존기술이 부족해 다음세대로 그 발굴을 연기하게 되었다는 말만 살짝 흘렸다고 한다. 그 발표와 함께 10년전부터 고구려의 역사를 중국역사에 편입시켜 자국학생에게 가르치고 전 세계에 고구려 역사가 중국역사라고 홍보하고 있는 중이다. 
 
보시는 바와 같이, 북중국의 피라미드들은 위로갈수록 낮아지고 계단식 형태의 모양을 띄는 만주와 한반도에 널려있는 고구려의 무덤과 너무나도 똑같은 모양과 형태를 가지고 있다. 학계에서는 이러한 건축공법을 들여쌓기 공법이라고 부르며, 중국과 일본에는 찾아볼 수 없는 고구려 고유의 건축공법이라는데 의의를 다는 학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면, 이 5,000년 전에 이 지역에서 이런 문명을 가진 집단은 누구일까? 
 
중국인인가? 아니다. 중국인은 황하 유역에서 농사짓고 청동기 만들고 있었다. 몽골인인가? 아니다. 몽골인들은 당시 존재도 없었다. 거란족? 오환족? 이들은 완전 유목민으로서, 정주 문명과 관계없다. 여진족? 이들도 유목민이다. 5,000년 전에 이 지역에 관계된 국가나 민족은 누구인가? 모든 역사책에는, 이 지역에 단군 조선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아직은 추측에 불과하며 충분한 조사와 연구가 이루어진 후에 밝혀질 일이다. 아무튼, 고구려 및 고조선 등과의 연관성은 배제하더라도, 중국이 이 유적들을 애써 감추고 있는 것은 석연치 않은 일이다. 

 

중국 피라미드 발굴 - 故 장문구(張汶邱 )씨가 임종전 증언내용

 

- 당시 발굴요원이었던 故 장문구(張汶邱 )씨의 임종전 증언 내용-

" 1963년4월에 우리 고적발굴팀 36명은 당국으로부터, 진시황의 다른무덤으로 추정되는 유적을 조사해야하니 대기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출발전, 조사단장은 우리발굴단원들에게 이번 유적은 매우 중요하여 조사,발굴 내용을 외부에게 일체 누설하면 안되니 이점을 각별히 유념하기 바란다고 말하였고, 우리일행은 기차와 버스,트럭을 나누어타고 이틀만에 목적지인 넓은 평원지대에 도착하였는데 창밖으로 이집트 피라밋처럼 거대한 피라미드들이 많이있었고, 도착한 우리발굴단원들은 하나같이 모두 탄성을 질렀어요. 

우리 중국에도 이런 피라밋이 있었구나! 하는 기쁨과 경이로움이 뒤섞여서 말이죠, 우리는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의 또다른 이 엄청난 유적을 발굴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조사단은 4팀으로 나뉘어져 이후 3일동안 피라미드의 가장 큰 순서대로 먼저 가운데 3개 피라미드를 지정하여 발굴하기 시작했습니다. 3곳다 거의 한 형태의 것이었는데 이중 양옆의 두곳보다는 가운데것이 대단했어요.거대 한 벽돌 피라밋 지하입구로 들어가자 약 3~5층으로 석실이 나뉘어져 있었고, 상층부 공간으로 들어갈수록 말과 마차를 그림으로 화려하게 조성된 벽화,그림,여러 문자(중국글 한국글등)들, 조각류 약 6200여점, 맷돌,절구,솥,그릇등 생활도구 1500여점, 배추김치(원래김치인 백김치) 동물의 뼈등 음식물 400여점, 청동검 활 금관(신라형) 칼,창등 장신구류등 부장품 7800여점, 상투머리를 한 정 중앙시신(진시황의 모습과 흡사했슴)등 14구과 호위상 3000여점등이 대량발견 되었습니다.우리는 난생처음보는 이러한 너무나도 엄청난 유물,유적에 대해 모두 하나같이 무엇에 홀린듯하였으며, 마치 외계인의 세계,외계인의 무덤을 발굴하고있는듯한 느낌들이었습니다.


저는 그 유물들을 확인하면서 목록을 작성하는 일을 했었는데, 작업 3일째되던날 대충 7할정도 파악,작성된 상황이었고 이날 오후쯤에 이를 당시 발굴 단장이던 모 교수에게 중간 보고하자 그분은 큰 한숨을 내쉬면서 이런말을 했어요, 이 유적은 우리 황하족유물이 아니라 조선인들의 유적이다...중화역사 이전의 조선문명이야! 라고 말하면서 큰일이다!..일단 당국에 보고 한 후에 다시 지시를 받아야 하니 지금까지 발굴을 모두 중단하고 유물들은 모두 그자리에 두고 일단,오늘은 그만 나가세!" 라고 말하여 모두 발굴을 중단한채 나와 숙소에 있게 되었는데, 그날 밤 발굴중단과 동시에 철수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우리 발굴단원들은 모두 의아하게 생각했으나 곧 그 유적이 우리의 유적이 아니기때문이라고 이해하였고 일행은 그곳에서 떠나기에 앞서 숙소에서 현지공안에게 이곳에서의 비밀을 지키겠다는 서약서를 작성 제출였고, 그렇게 돌아온 이후, 그 피리미드들에 관해 더이상 들은적은 없습니다. 그게 그 피라미드에 대한 저로써의 마지막이었고 제가 아는 다 입니다" 

- 당시 발굴요원이었던 故 장문구(張汶邱 )씨의 임종전 증언 내용-

 

 

[출처: 블로그-인생과 삶의 빛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