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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사

<신당서>와 유물이 입증한 환단고기의 기록

출처 - https://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76968 

 

스카이데일리, <신당서>와 유물이 입증한 환단고기의 기록

스카이데일리, 일제식민사학을 추종하는 강단사학계는 자기네 이론이 허구라는 사실이 만천하에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 <환단고기>의 모든 내용을 위사(僞史)로 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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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서>와 유물이 입증한 환단고기의 기록

백제·신라 땅 충청·경상도에서 고구려유물 발굴돼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18-09-01 16:51:00

 

▲ 성헌식 역사 칼럼니스트(고구리역사저널 편집인)

 

일제식민사학을 추종하는 강단사학계는 자기네 이론이 허구라는 사실이 만천하에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 <환단고기>의 모든 내용을 위사(僞史)로 규정했으며, 우리의 자랑스러운 상고사가 기록되어 있는 <환단고기>를 신봉하는 재야사학을 환빠라는 이상한 용어로 비하하고 있다. 그러나 <환단고기>는 진실된 역사임이 여러 자료들을 통해 입증되고 있다.

 

중국사서나 유물로 입증되기도 하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대진국(발해)의 자체연호사용기록이다. <환단고기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 고구려의 정통성을 그대로 계승한 대진국의 초대 황제 대중상과 2대 대조영의 후손 12명 황제들의 자체연호사용기록이 있는데, 이는 <신당서>에 기록된 9명의 왕들이 사용했다는 연호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게다가 위 대진국의 자체연호 중 1949년 중국 길림성 돈화에서 발견된 정혜공주묘비와 1980년 중국 길림성 화룡현에서 발견된 정효공주묘비명에 대흥보력효감성법대왕(大興寶曆孝感聖法大王)’이라는 문구가 새겨져있어 부황인 4대 문황제(대흠무)의 연호가 대흥(大興)’이었음이 명확하게 입증되었다. 사실이 이러한데 식민사학계는 왜 <환단고기>가 위서라고 억지를 부리는지 모르겠다.

 

▲ <환단고기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와 <신당서>의 기록 비교표 [사진=필자 제공]

  

백제 땅 충청도에서 출토된 고구려유물

 

또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는 대진국 뿐만 아니라 전신인 고구려도 자체연호를 사용한 황제국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장수홍제호태열제(長壽弘濟好太㤠帝)는 건흥(建興)으로 연호를 바꾸었다는 기록과 이 외 7명 황제의 자체연호사용기록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왕들의 연호가 단 하나도 기록되어있지 않다.

 

고구려 황제들의 자체연호사용을 입증하는 유물로는 19세기 말 중국 길림성 집안현에서 발견된 광개토태왕비문이 있다. 거기에 영락(永樂)이라는 연호가 새겨져있는데, 호태왕비의 발견이 1911 <환단고기>가 출간되기 이전이라 저자가 비문을 보고 적었을 수도 있다고 트집을 잡힐 여지가 있었다.

 

그런데 1915년 충청북도 충주시 노은면에서 건흥 5년 병진(建興五年丙辰)’이 새겨진 금동석가삼존불이 발견되었다. 학계에서는 출토지가 충청도라 백제 법왕, 성왕, 위덕왕의 연호로 추정했다가, 중원고구려비가 발견되자 고구려 불상으로 비정했다. ‘건흥 5년 병진 536(안원왕 6)으로 비정하면서 장수왕 또는 영양왕의 연호라는 견해도 있다고 발표했다.

 

▲ 1915년 충주에서 발견된 금동석가삼존불광배에 새겨진 건흥5년 [사진=필자 제공]

 

또한 818년 발해 간왕이 죽자 즉위한 선왕이 건흥을 새 연호로 사용했으며 830년 즉위한 이진왕은 연호를 함화로 바꿨다. 이 밖에 고구려 연호인지 여부도 확실치 않고 연대도 헤아릴 수 없다면서, 중국에서 건흥을 연호로 사용한 왕조가 촉한(223237), (253), 성한(304305), 서진(313316), 전량(313319), 후연(386395)이라면서 중국유물일 가능성도 언급했다.

 

그런데 간지가 병진년인 해는 BC 4, 56, 116, 176, 236, 296, 356, 416, 476, 536, 596, 656, 716, 776, 836년이므로 건흥이 발해 간왕과 중국 왕조의 연호일 수도 있다는 학계의 발표는 황제국 고구려를 부정하려는 어불성설임을 알 수 있다.

 

유물의 명문처럼 416년이 재위 5년이 되어야하는데 <삼국사기> 기록에는 장수왕 4년으로 1년 차이가 나며, <고구려사초략>에는 장수대제 3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재위 5년이 병진년(296)인 왕은 창조리의 정변으로 폐위된 봉상왕이 있어 혹시나 했으나, 당시는 연호를 사용하지 않을 때였고 다른 자료들에 건흥은 장수제의 연호라고 기록되어있기 때문이다.

 

신라 땅 경상도에서 발굴된 고구려 유물

 

1963년 경상북도 의령군에서 출토된 금동여래입상에는 延嘉七年(연가 7)歲在己未(기미)高麗國樂良(고려국 낙랑)”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는데, 이 불상은 경상도에서 출토되었음에도 고려국이라는 명문 때문에 신라유물로 분류되지 않고 고구려 유물로 분류되었다. 만약 명문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관례처럼 신라유물로 분류되었을 것이다.

 

학계에서는 539년에 만들어진 고구려불상으로 추정했는데 문제는 기미년인 539년은 안원왕 9년이므로 연가 7년이라는 명문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고구려사초략>에는 안원제의 즉위년도는 삼국사기와 같으며 연호는 대장(大藏)이라고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 때 기미년은 BC 1, 59, 119, 179, 239, 299, 359, 419, 479, 539, 599년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의 왕 중에 즉위 7년이 기미년인 왕은 59년의 태조왕과 419년 장수왕이다. <고구려사초략>에는 59년이 대무신제 32년이고 419년은 장수제 6년이므로 연대가 잘 맞지 않아 아닌 것으로 보인다.

 

▲ 1963년 경남 의령에서 발견된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 [사진=필자 제공]

 

하나 더 소개를 해보겠다. 1926년 조선총독부 박물관에서 근무하던 고이즈미는 경주에서 발굴된 서봉총(瑞鳳塚)에서 봉황 무늬의 금관과 함께 연수 원년 신묘(延壽元年辛卯)’라고 새겨진 은합이 출토되자 신라고분의 편년연구에 중요한 자료라고 발표했다.

 

지금까지 모두들 신라고분으로 알고 있는 서봉총은 실상은 고구려고분일 가능성이 높다. 왜 그런지 그 이유를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겠다. 신라 서봉총에서 발굴된 은합우(銀盒盂)에는 延壽元年(연수 원년)太歲在辛()三月中 太王(태왕)敬造合木于三斤 延壽元年(연수 원년)太歲在卯()三月中 太王(태왕)敬造合木于用三斤六兩 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명문 중에 태왕이 언급되어있기에 이 은합우는 고구려유물이 확실하다. 게다가 연수(延壽) 원년이 신묘년이라고 하는데 삼국시대 신묘년은 31, 91, 151, 211, 271, 331, 391, 451, 511, 571, 631년이다. 우선 중국에서 사용한 연수라는 연호에 원년 신묘년이 없고, 백제와 신라에서도 신묘년에 즉위한 왕이 아예 없다.

 

고구려에서는 고국원왕이 즉위한 331년과 광개토태왕이 즉위한 391년이 신묘년이다. <삼국사기>에는 광개토태왕의 즉위년도가 392년 임진년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분명한 오기이다. 그 이유는 집안에서 발견된 호태왕비와 <고구려사초략>에 즉위년도가 신묘년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수라는 연호의 주인공은 고구려 고국원왕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고구려사초략>에도 고국원제의 사용연호기록이 없어 이를 입증할만한 사료가 없었다. 최근 소개된 러시아 소장 자료에 의해 연수(延壽)는 고국원제의 연호이며, 연가(延嘉)는 안원제의 연호, 북한출토유물에 새겨진 영강(永康)은 양원제의 연호였음이 밝혀졌다.

 

▲ 경주가 과연 신라 땅인가라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는 연수원년명 은합 [사진=필자 제공]

 

위 유물들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고고학계는 경상도에서 유물이 발견되면 무조건 신라유물, 충청도나 전라도에서 유물이 나오면 무조건 백제유물, 한강 이북에서 유물이 출토되면 무조건 고구려유물, 경기도 출토이면 그때그때 다르게 발표했다. 이러한 출토지에 따른 천편일률적인 유물의 국적분류는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초등학생이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고구려·백제·신라의 중심지가 한반도가 아니라 현재 중국대륙이었음이 역사적 사실로 밝혀지고 있다. 즉 이 말은 경상도 경주가 신라 땅이 아니고, 충청도 부여·공주가 백제 땅이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다. 위 유물들은 그러한 역사적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