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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3.1운동의 영웅의 탄생 비화_유관순 傳은 가공된 허구다


[특강2] 3.1운동의 영웅의 탄생 비화_유관순 傳은 가공된 허구다



출처::이솔해



3.1만세운동의 영웅 유관순은 가짜였다 - 1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파리 강화회의에서 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이 스스로 결정하자.”라는 소위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하였다.

 

이에 강대국의 식민지배를 받고 있던 인도 등 수많은 식민지 나라들이 독립을 주장하고 나섰다.

 


우리가 아는 3.1만세운동의 영웅 유관순은 1920년 서울역에서 소매치기하다 붙잡혀 감옥살이 했던 유관순이다.

3.1만세운동과는 전혀 관계없는 인물이다이 절도범이 어떻게 교과서에 등재하였고3.1만세운동의 영웅으로 둔갑되었을까?


그 진실을 알아보자.

 

191921조소앙(趙素昻), 신채호(申采浩) 선생은 현 대륙 길림성지역에서 3.1기미독립선언2.8동경독립선언보다 더 빨리 무오독립선언서을 발표하였다.

 

이 땅에선 천도교 14명를 중심으로 개신교 15, 카톨릭 2, 불교 2명 등 33인의 종교인들이 31일 파고다공원에서 기미독립선언(독립선언 하지도 않았음.이하 종교만세선언)을 하기로 했다.

 

그러나 명단에 오른 종교인 중 개신교목사, 카톨릭신부, 불교 승려들은 나오지 않았다.

(천도교를 중심으로 3.1만세운동을 준비하던 2월에는 개신교 이승훈목사에게 5천원(현시가 10억원 정도)을 주었다는게 밝혀짐)

 

31일 일제는 이들의 종교만세운동을 알아채고 종로파고다 공원을 에워싸고 있었다.

 

이로 인해 파고다공원에 참가한 천도교인사들은 천도교 교주 손병희의 애첩이 운영하는 종로 태화관에 모여총독부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자부로에게 전화를 걸어 자수하였다.

 

자수는 일제 치안유지법(현 보안법)을 위반했기에 자수하게 된 것으로형량을 최소화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땅의 백성들은 종교인들이 기획한 종교만세운동도 하고, 이땅의 독립을 원하는 만세운동도 하였다.

 

조선총독부 기록에 의하면 만세운동에 참가한 인원이 106만 명인데그 중 사망자가 7,500명 가량이며 구속자가 47,000여 명이었다.

 

그렇다면유관순이 어떻게 3.1만세운동의 영웅이 되었을까?

 

 


1945년 인천으로 들어오는 미국군.

 

유관순이 3.1만세운동의 영웅으로 만들어진 것은 일제패망 이후였다.

당시의 시대상황을 이해하고 넘어가야만 한다.

 

1945년 일제 패망으로 미군정이 시작되었다.

우리 민족의 고통과 불행의 원천은 미군정이다.

 

미군정은 일제시대 경성을 쉐울(SHEOL. 지옥...)로 불렀다.

 

대한민국 정부수립시에는 SHEOLSEOUL(서울. 영어, 한문, 한글 등 아무런 뜻도 없는 지명이 생겨남)로 고치고 특별시로 승격시켰다.

 

미군정의 SHEOL로 호칭한대로 미군정의 시기에는 그야말로 혼돈의 시대지옥의 시대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시대에 미군정과 과도기적 친일파(민족반역자 총칭)들은 1948510일 유엔(UN)의 감시를 받으며 실시된 자유총선거에 의해 대한민국 정부가 평화적이고 민주적으로 수립되었다고 호도한다.

 

그러나 1945815일의 해방은 진정한 해방이 아닌 또 다른 억압의 시작이었다.

 

동년 98일 헬리콥터에서 뿌려진 미군의 전단지에는 조선인에게 해방을 축하한다는 글자는 한 줄도 없고 일본인과 미군에게 섣부른 짓을 하면 좋지 않을 것'이란 경고만이 실린 삐라가 살포되었을 뿐이었다.

 

미군은 마치 적지에서 작전을 전개하듯 완전 군장을 하고 비행기의 엄호를 받으며 살벌하게 인천에 상륙했다.

 

미군을 해방군(解放軍)’으로 착각해 환영하러 나갔던 사람들 중 일부는 오히려 폭도로 오해를 받아 미군의 총탄 세례를 받았다.

 

미군은 즉각 한 나라에 두 정부가 있을 수 없다.’며 건국인민위원회를 해산시켰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양민학살이 자행되었다.

 

군정장관(軍政長官)인 미육군 소장 아놀드 (Archibold V. Arnold)는 동년 109인민위원회의 지도자들은 유치하고 어리석고  락한 사기꾼들이며, 보고 있기 괴로운 괴뢰극을 벌이고 있다.”며 여운형 선생 등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리고는 전국 각지에 미군을 파견하여 인민위원회 지도자들을 무력화하고 지배권을 장악했다.

 

그리하여 미군은 민족을 짓밟고 일제의 개, 돼지, 말이었던 친일파들을 불러들였다.

 

이들을 통해 인민위원회 등 민족지도자들을 체포하자는 속셈이었다.

 

미군정은 늘 배후에만 있었고 사건이 나면 교활한 중재역만 맡았다.

 

미군정은 처음부터 조선인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자주적인 독립국가를 세울 뜻이 없었다.

 

미군정은 점령 즉시 미군정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이승만(李承晩)과 장택상(張澤相)의 지휘로 우익청년단을 구성하여 농민과 노동자의 자주적 역량을 백색테러로 파괴했다.

 

해방 직후의 혼란의 세월은미군정과 친일파들이 자행한 불법연행고문구속학살부정부패식량탈취 등등의 백색테러 때문이었다. 대중은 항상 폭력과 가짜 논리에 시달려야 했다.

 

미군정은 그들이 원하는 문화와 신념체계 그리고 그들의 정치적 관심에 따른 맹목적 동조를 필요로 하는 교육을 시행했다.

 

이를 위해서는 조선인은 열등한 종족이므로 시키는 대로 무조건 해야 된다는 일제의 식민사관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식민사관을 기조로 하는 교육을 통해 펼칠 수 있는 정치의 형태는 그저 대중을 찍어 누르면 되는 뻔한 것이다.

 

해방 이후의 이념적 빈 공간에 미군정은 민주주의란 산만하고 공허한 말만 제시했고, 친미유학파서구종교인 혹은 일제에 부역한지식인들은짜 맞춰진 새로운 영역 즉 미군정의 입맛에 맞는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교육과 문화의 수장 자리를 하나씩 꿰차고

미군정을 보호막으로 하여 기득권을 유지하거나 일신의 영달을 꾀했다.

 

그것이 여의치 않다고 판단되면 조작을 서슴지 않았다.

 

일제에 부역한 친일세력인 친일파들은 자신의 국가권력의 정통성을 합리화하기 위해 이용했던 반탁운동의 역사는 국민을 기만한 거짓말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민족을 격분 시킨 것은 5개년 간의 신탁통치 안이었다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국영국소련의 3국 외상회의에서 한반도에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결정(194512)에 대하여 우리 국민은 결연히 일어나 맹렬한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우리민족의 역사적 전통과 능력을 무시한 이러한 결정에 온 국민은 분노했으며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가 결성되면서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처음에는 북한 공산주의자들까지 반탁운동에 참가(19461)하여 민족적 단합의 계기가 마련되는 듯 했으나소련의 사주를 받은 그들은 하루 밤 사이에 민족적 양심을 외면한 채 찬탁을 외쳐 국민의 빈축과 실망을 샀다.


한국 문제가 온 국민의 반탁운동으로 난국에 부딪히자그 후 한국 문제를 해결하고자 두 차례에 걸쳐 소 공동위원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그러나 소련 측이 찬탁을 주장하는 단체들로 정부를 수립하기를 고집하여 모든 정치단체의 참석을 주장하는 미국 측의 주장과 합의를 보지 못한 채 결국 미소 공동위원회는 결렬되고 말았다."

 

위 인용문은 1990년대 초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 나온 것을 옮겨 놓은 것이다.

 

반탁운동에 관한 이러한 서술은 해방 이후의 정국에서 공산주의자들은 어떤 점에서 잘못되었고, 공산주의자에 대항하여 싸운

대한민국의 건국공로자들이 어떤 점에서 올바른 것이었는지를 입증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고 있다.

 

그것은 이후 전개된 분단국가 건설을 정당화하는 전제를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누가 민족의 자존심을 지켰는가를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신탁통치에 찬성한 좌익세력은 두말할 것 없이 민족을 팔아먹은 매국노 사대주의자들이요신탁통치에 반대한 것이야 말로 진정한 애국자인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오늘날 학교교육을 받은 국민들의 공통된 생각이다따라서 그것은 대한민국의 건국의 정통성을 입증하는 근거가 되어 있다.

 

하지만 역사의 진실은 이러한 것이 사기임을 말해준다.

 

먼저 위 국사교과서에서부터 진실의 실마리를 풀어 보자.

 

국사교과서는 신탁통치를 둘러싼 운동집단으로 소련과 미국, 북한 공산주의자와 온 국민을 등장시킨다.

 

여기에서 북한 공산주의자란 당시 자주적 통일국가를 건설하고자 싸웠던 이른바 좌익진영을 매우 협소하게 줄인 말이고,

온 국민은 당시 친미적 분단국가 건설을 위해 싸운 지주와 자본가들의 정치세력인 이른바 우익진영을 터무니없이 확대한 말이다.

 

당시의 좌익진영은 소련의 사주를 받고서 하룻밤 사이에 민족적 양심을 외면한 채 찬탁을 외친 것으로 되는데,

여기에서 교과서는 은연중에 신탁통치의 주역이 소련인 것처럼 암시하고 있다.

 

반면 소련과 대립하는 미국은 모든 정치단체의 참석을 주장함으로써 역시 민주주의의 모범국가임을 시사함과 함께 신탁통치에 대해서 소련만큼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그러면 신탁통치의 창안자는 과연 누구일까?

스탈린(Stalin)일까아니다.

 

신탁통치를 창안한 사람은 미국의 대통령 루스벨트(Roosevelt).

 

2차 세계대전 중에 테헤란(Teheran)회담과 얄타(Yalta)회담 등 연합국 수뇌가 모인 자리에서 한반도에 대해 최고 30년에 이르는

신탁통치를 실시하자고 제안한 자는 분명히 루스벨트다.

 

그는 미국영국중국(대만)소련의 4대 강국이 한반도를 신탁통치하면 영국과 중국이 미국의 동맹국이기 때문에 한반도를 미국의 수중에 넣을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것이 19451216일 모스크바(Moskva)에서 개최된 미국영국소련 삼국외상회의의 역사적 전제였다.

 

이 삼상회의에서 조선은 가능한 빨리 독립되어야 하며 이를 보장하기 위해 조선민주주의 임시정부가 창건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 쪽은 소련이었다.

 

미국과 소련은 밀고 당기는 협상에서

첫째, 조선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창건할 것.

둘째, 임시정부에 협력하여 활동할 미소 공동위원회를 조직할 것.

셋째, 소 공동위원회의 후견기간을 5년 이내로 할 것.

 

위 사항으로 집약되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의 전문이 발표되었다.

 

따라서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은 루스벨트가 주창한 신탁통치가 아니라, 독립된 조선정부를 세우기 위한 임시정부 수립안이었다.

 

조선은 가능한 빨리 독립되어야 하며 이를 보장하기 위해 조선민주주의 임시정부가 창건되어야 한다.”는 것을 미국의 흉모(凶謀)와 이승만과 친일파들의 계략으로 신탁통치로 조작둔갑해 신탁통치 찬반양론으로 극심한 대립을 하게 된다.

 

그런데 당시 미군정과 손잡고 그 앞잡이 노릇을 하던 친일세력의 정치집단인 한국민주당과 동아일보는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이 신탁통치라고 선전하면서 대대적인 반탁운동에 들어갔다.

 

식민통치나 다름없는 신탁통치를 결사반대해야 하며, 신탁통치를 주창한 미국에 반대해야 맞다.

 

하지만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은 신탁통치가 아닌 조선민주주의 임시정부를 보장하는 후견제였다.

 

그러나 1946110일 친일파들의 소굴인 한국민주당은 소련은 신탁통치를 강조했고미국은 즉각적인 독립을 옹호했다.”고 국민을 기만하며 거짓 선전했다.

 

지난날 미국의 윌슨 대통령에게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를 구걸한 자가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이 반탁운동의 선두에 나선 것이다.

 

남한에서 벌어지는 사태에 당황한 소련 측은 기자회견을 자청하여 1946126일 모스크바 회담 경과의 전말을 공개했다.

 

처음에 신탁통치를 제안한 것은 미국이었으며미국의 제안에 따르면 신탁통치는 10년간 계속되는 것이었고, 신탁통치의 실시에 앞서 조선 전체의 통일민족정부를 수립하는 데 아무 관심이 없던 쪽은 미국이었음을 밝혔고 미국 국무장관 에치슨(Acheson) 역시 이러한 소련 측의 회견을 타당한 것으로 인정했다.

 

반탁운동의 선두에 섰던 김구 선생은 이승만의 모략 계략를 알았는지 몰랐는지 밝혀지지 않았지만이승만 친일파들의 반탁운동에

통째로 이용당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승만의 반탁운동이친미 분단정권을 수립하기 위한 흉계였음이 드러나자김구 선생은 이승만을 반대하고 통일 독립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투쟁에 동참한다.

 

당시 미군 주둔 연장을 자기네의 생명 연장으로 인식하는 무지한 친일매국노 무리들은 국가민족의 이익을 염두에 두지 않고, 통일정부의 수립을 두려워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유언비어를 만들어 대중을 선동하여그들이 원하는 대로 남한만의 단독정권을 수립하였다.

 

남한단독정수립의 이면에는 친일파와 서구종교인들이 대거 가세했다.

 

북한에서 친일파였다 월남한 자와 남한에서 서구종교를 믿는 젊은 층들이 주축으로 만든 '서북청년단'은 민족지도자와 양민들을

빨갱이로 몰아 죽이는 극악한 만행을 하였고이승만 일당의 밀명을 받은 개신교 모윤숙 등은 낙랑구락부를 만들어 미군정과 UN고문단에게 대학을 다니던 여대생들을 술집작부로 만들어 성접대를 하는 양면작전을 펼쳤고개신교도 모윤숙은 직접 UN조선임시위원단장 메논에게 몸바쳐 동거생활까지 했다.

 

메논은 모윤숙을 만나기 전까지 남한단독정부를 반대했고, UN상임이사국 중미국을 제외한 국가들이 반대하고 있었으나메논의 적극적인 로비로 단독정부수립을 승인하고 만다.

 

모윤숙일당들이 만든 낙랑구락부는 일본군위안부를 본딴 미군위안부 원조.


 

1948312일 유엔 조선임시위원단 메논 단장이 '남한 단독선거안을 지지하도록 로비한 친일시인 모윤숙은 그해 12

유엔총회 한국대표로 참석했다파리에서 열린 이 총회에서 대한민국 정부를 승인하자 한국대표단 8명이 기쁜 표정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사진 앞줄 왼쪽부터 모윤숙, 조병옥, 장면 김활란 이화여대 전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