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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선 역사

누가 동이(東夷)족인가?

우리는 우리가 한민족 즉, 동이족으로 알고 있다. 여러 사서에나 여러 일화에서 말하듯  우리는 그렇게 알고 그렇게 믿고 있었다. 

“우리나라 초대 문교부장관인 안호상(1902~1999) 박사가 장관시절, 중국의 세계적 문호 임어당(林語堂, 1895~1976)을 만났을 때 여담처럼 말했죠. ‘중국이 한자를 만들어 놓아서 우리 한국까지 문제가 많다’ 고요. 그러자 임어당이 놀라면서 ‘그게 무슨 말이오? 한자는 당신네 동이족이 만든 문자인데 그것도 아직 모른단 말입니까?’라는 핀잔을 들었답니다.”

정말 우리 한민족이 동이족일까? 결과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동이를 찾아 보자.

 

먼저, 성종실록 134권, 성종 12년 10월17일 무오 1번째 기사

남원군 양성지가 상언하기를, 생략 - 신이 고금(古今) 천하의 형세(形勢)로 말씀드리면, 구주(九州) 안은 오직 중국 황제가 다스리는 바이며, 사해(四海)의 밖으로 서역(西域)은 총령(葱嶺)776)  과 사막(沙漠)이 약 3만 리나 되며, 북쪽은 사막(沙漠) 불모(不毛)의 땅이어서 황막(荒漠)하기 끝이 없고, 동이(東夷)는 일본으로써 바다로 둘러쌓인 나라이며, 남만(南蠻)은 점성(占城)과 진랍(眞臘) 땅으로서 계동(溪洞)과 열병(熱病)이 심하여 중국과는 옛부터 통교가 없는 곳이며, 서쪽은 파촉(巴蜀)·검각(劍閣)으로의 길로서 진(秦)나라 때에 처음으로 개척하였고, 남쪽은 담이(儋耳)·경애(瓊崖)의 땅으로 한(漢)나라가 비로소 군(郡)을 두었습니다.

[원본]

臣以古今天下之勢言之, 九州之內, 固中國帝王之所理也, 四海之外, 西域則葱嶺流沙幾三萬里, 北方則沙漠不毛, 窮荒無際, 東夷則扶桑日本, 環海爲國, 南蠻則占城眞臘, 溪洞瘴厲, 此自古不通乎中國者也, 西曰巴蜀、劒閣之路, 秦始開之, 南曰儋耳瓊崖之地, 漢始郡之。

 

'동이칙부상일본'을 기록하고 있다. 부상은 해가 돋는 동쪽 바다를 뜻한다.

이 기사에선 직설적으로 동이는 일본이다라고 진술한다.

 

선조실록 113권, 선조 32년 5월 20일 정묘 4번째기사   1599년 명 만력 27년

경리 도찰원이 보낸 등황조서

경리 도찰원(經理都察院)이 【만세덕(萬世德). 】 보낸 등황 조서(謄黃詔書)092) 는 다음과 같다.
"봉천승운황제(奉天承運皇帝)는 조서를 내린다. 짐이 대통을 이어 억조 창생을 다스리니, 바닷가나 산골짜기의 인민도 다 나의 적자(赤子)이므로 정말 큰 악인이 아니면 두루 포용하고자 하였다.
근자에 동이(東夷)의 작은 괴수 평수길(平秀吉)이 외람되이 천한 종의 신분으로 감히 난리를 일으켜 먼 지역을 차지하고 여러 섬을 복속시킨 뒤 드디어 천하를 잠식하려는 뜻을 품고는 나의 속국을 엿보아 이기도(伊岐島)와 대마도(對馬島)에 횡포를 부리고 낙랑(樂浪)과 현도(玄菟)의 지경에 침입하여 살육을 자행하였으므로 그곳 임금과 신하가 도망치고 인민이 흩어졌다. 그리하여 글을 올려 난리를 급히 고하며 구원병을 보내 구해주기를 청하였다.
짐이 생각건대 ‘조선은 대대로 공순하다고 일컬어졌는데 마침 곤란을 당했으니 어찌 좌시만 할 것인가. 만약 약자를 부축하지 않으면 누가 은덕을 품을 것이며, 강자를 벌주지 않으면 누가 위엄을 두려워하겠는가. 더구나 동방은 바로 팔다리와 같은 번방(藩邦)이다.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3205020_004 

임진난을 일으킨 평수길. 동이의 작은 괴수로 기록하고 있다. 

 

인조실록 2권, 인조 1년 7월 5일 계사 3번째기사   1623년 명 천계3년

주강에 《논어》를 강하고, 군량의 비축 등에 관해 논의하다
"백성을 보전하는 데는 산성보다 나은 곳이 없습니다. 중국 사람이 ‘동이(東夷)는 산을 의지하여 성을 만들어 함락시키기 쉽지 않다.’ 하였는데, 신의 뜻도 반드시 산성을 설치한 다음에야 되리라고 여겨집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백성을 보전하는데는 산성보다 나은 곳이 없다라는 예로 동이를 들고 있다. 우리도 산성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인조실록 19권, 인조 6년 9월 29일 병술 1번째기사  1628년 명 천계8년

정경세는 흠자의 뜻, 이귀는 육진의 일, 홍방은 새 황제의 일을 아뢰다
"중국 조정의 정령(政令)은 어떠하던가?" (中朝政令如何?) 하니, 홍방이 아뢰기를,
"새 황제는 경술년 태생으로 사람들이 모두 정력을 기울여 정치를 잘 해보려는 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원숭환(袁崇煥)에게 너무 큰 기대를 걸고 있는데, 편전(便殿)에서 불러 보고 지극한 말로 위유(慰諭)하니, 숭환이 대답하기를 ‘황상께서 신에게 편의만 제공해 주신다면 5년 안에 동이(東夷)를 평정하고 요동 전체를 회복할 수 있다.’ 하였답니다

여기서 동이는 여진족의 후금세력을 뜻한다. 

 

 

인조실록 21권, 인조 7년 7월 28일 신해 3번째기사   1629년 명 숭정2년

원 경략(袁經略)이 이첩(移帖)하였다.
"흠명 출진 행변 독수 계 요 천진 등 래 등처 군무 병부 상서 겸 도찰원 우부도어사(欽命出鎭行邊督帥薊遼天津登萊等處軍務兵部尙書兼都察院右副都御史) 원숭환(袁崇煥)은 조선 국왕에서 첩문(帖文)을 보냅니다.
지난해 황제 폐하에게 주문(奏文)을 올리는 일과 관련, 영광스럽게도 국왕께서 변변치 못한 본관을 잊지 않으시고 대도(大道)를 일러주시며 국휼(國恤)에 대해 잊지 않고 정성껏 교시해 주셨으니, 혈기를 가진 자로서 잊지 못할 바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다시 요동 지역에 나오게 되었으니 국왕과는 숙연(夙緣)이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리고 전해 오는 국왕의 소식을 들으면 마치 서로 얼굴을 대하는 듯 설레이기만 합니다. 되돌아 보건대 동이(東夷)048) 가 제멋대로 포학한 행동을 저지르면서도 우리 중원(中原)의 봉시(封豕)049) 는 그냥 놔둔 채 국왕의 강토만 잠식해 왔습니다. 병인050) ·정묘년의 전역(戰役)에서 노추(老酋)가 스스로 멸망을 불러들이고 노추(奴雛)가 두 번이나 넋이 빠질 정도로 혼이 나긴 했지만 동쪽의 산하에서는 여전히 머무르고 있으니, 이 점이 바로 내가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리면서 잠 자고 밥 먹을 겨를도 없이 애태웠던 이유인 것입니다.
  • [註 048] 동이(東夷) : 청(淸)나라를 지칭함.  실록에서도 동이는 청이라고 설명한다.

명군 장수 원숭환이 조선왕에게 보낸 첩문으로 여기서 동이는 청나라다.

 

위의 실록에서 보았듯 조선에게 동이는 일본이고, 명의 입장에서 여진족(후금, 청)이 되는 것이다.

특이한 것은 조선개국 초기 즉, 태조실록에는 직설적으로 조선을 동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당연히 우리의 역사를 조작하기 위한 것이고 실록이 손이 탄 흔적들은 많다.

우리가 배운 역사에서 여진족은 조선의 북쪽인 만주에서 거주한 것으로 나온다.  명나라 입장에서 북쪽 또는 북동쪽이 된다. 근데 동이로 기술하고 있다. 

여진족의 위치를 생각해 볼수 있는 내용이 있는데 아래와 같다.

국왕께서도 스스로 힘을 축적하시어 기틀을 보아 결판을 낼 준비를 하시면 다행이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나도 활집을 단단히 잡아 매고 국왕과 함께 동서로 기각(掎角)의 형세를 이루어 바다와 육지로 병진(竝進)하면서 앞 뒤에서 합동 공격을 펼치겠습니다.

위 내용은 명군 장수 원숭환이 조선왕에게 보내 첩문중에 나오는 내용인데 조선이 준비가 되면 자기와 함께 동서로 기각의 형세를 이루어 바다와 육지로 함께 합공하자는 얘기다.

이 내용에서 생각해 볼수 있는건 명과 조선사이에 여진족이 있고, 여진은 바다를 끼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배운 역사에서도 만주는 바다와 접해 있다. 명이나 조선은 여진을 머리위에 이고 있는 형상이다.

위와 같은 경우라면 바다로 병진할 필요가 있을까?

 

사마천의 사기나 고려말, 조선초의 기록에는 콕 찍어 동이를 우리라고 지정했지만 다른 세력임을 나타내는 내용들도 간혹 있다. 역사가 조작되었다는 건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왜 우리를 동이족으로 만들려 했을까?

생각해 보면 쉽게 답을 얻을수 있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