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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그리고 군사력

북한 현대사36 - 1.21 청와대 습격사건과 군부 강경파 숙청

북한 현대사 36 - 1.21 청와대 습격사건과 군부 강경파 숙청

1968~1969 한반도는 매우 긴박하게 돌아갔다. 1968년 1월 21일 북한 특수부대원들이 청와대를 습격한 1.21 사건 일어났고, 그 이틀 후인 1월 23일에는 미해군 첩보선 푸에블로호가 북한 해안에서 나포되었다. 또한 같은 해 10월 말에는 울진,삼척에 180여 명에 달하는 대규모 무장부대가 침투했고, 다음해 4월 15일에는 미군 해군정찰기 EC-121기가 북한 상공에서 격추되었다. 한마디로 한반도에 일촉즉발 위기 상황이 계속되었다.

 

1.21 사태는 한반도 위기의 시발점이었다. 북한의 특수부대원들이 청와대를 습격하고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서울로 침투, 세검정 고갯길에서 한국 군경과 교전 도중 무장게릴라 대부분이 사살된 사건이다. 사건으로 북에서 내려온 31명의 무장대원 가운데 1명은 생포되었고 4명이 도주했으며 나머지는 현장에서 사살되었다. 달아난 4 가운데 1명은 사살되고 3명은 북으로 귀환했다. 사건으로 남북관계는 최악의 상황으로 얼어붙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전쟁도 불사한다 각오를 피력했고, 사회 전반에 걸쳐 반공체제와 국민통제장치를 강화했다.

 

그러면 1.21 습격사건은 어떻게 일어난 것인가. 도대체 백주대낮에 청와대를 습격하고 대통령을 살해하겠다는 발상이 어떻게 가능했으며, 그것은 누구의 생각이었던가. 만일 청와대 습격이 성공해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었다면 전쟁이 발발하는 것은 거의 기정사실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김일성은 한국전쟁에 이어 2 6.25 예상하고 그런 명령을 내렸단 말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1.21 청와대 습격사건은 김일성의 지시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이 사건은 김창봉(인민무력부장), 허봉학(대남총정치국장허봉학(대남 총정치국장), 김정태(무력부부장 겸 특수작전국장) 등의 군부 강경파들이 작성한 ‘남조선해방과 통일전략계획’이라는 극좌적 군사모험주의계획의 일환으로 진행된 이었다. 이 사건은 군부 강경파, 특히 이들의 지도자격인 김창봉이 군권을 장악한데 이어 당권까지 넘보며 김일성 후계를 이으려는 욕심에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대남사업 업적을 통해 김일성에게 신임을 얻고 당시 사실상 2인자였던 노동당 조직부장 김영주를 끌어내리고 당내에서 입지를 강화하려고 했던 것이다.

군부 강경파는 지도부의 국방력 강화노선에 편승해 군벌화 경향을 곳곳에서 보였다.

 

당이나 정권기관에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하고 명령에 복종할 것을 강요하는 오만방자한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특히 특수부대는 특수훈련이라는 명목으로 공공기관을 마구 습격해 간부들을 납치하거나 민가를 기습하는 갖은 횡포를 저질렀다. 도처에서 농민들의 토지를 빼앗아 부업농장이란 것을 짓고 거기다가 술공장, 과자공장을 만들었으며, 경치 좋은 곳에는 특수부대 휴양소라 해서 별장을 짓고 주변의 처녀들을 납치 능욕하는 짓을 자행하기도 했다. 민족보위상 김창봉을 비롯한 수뇌들은 평남 온천과 강원도 세포 약수터에 별장을 지은 그곳에서 만든 밀주로 연일 파티를 벌이면서 호색방탕한 짓을 서슴치 않았다. 게다가 조직지도부장 김영주에 대해 저놈을 저대로 놔둬서는 되겠다.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열어 제거해야 한다. 험담을 거침없이 하곤 했을 정도로 당에 대해서도 안하무인격이었다.

 

이들이 이렇게 방자하게 행동할 있었던 것은 당시 노동당 지도부가 군부 상층부를 항일빨치산계와 그 심복들로 구성해 놓고 군 문제를 군부에 일임했기 때문이다. 전반적인 사항은 물론 김일성이 지도하는 당 정치위원회나 군사위원회가 관장하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군사행정이나 군 인사문제,작전문제 같은 것들은 군부 지도부에 위임햇던 이다. 결국 국방력 강화를 최우선시하는 노선과 정책, 그리고 김일성의 절대적 신임에 편승한 군부는 ‘군대제일주의’를 표방하면서 군벌화의 늪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의 행위는 1968년 9월경 김영주를 통해 김일성에게 보고되었고, 김일성은 즉각 군에 대한 검열을 지시했다. 김영주는 김일성의 지시를 받고 중앙당 부부장급, 도당의 부위원장급 이상의 핵심간부 중에서 2 명을 뽑아 검열 그루빠를 조직하고, 민족보위성에서부터 집단군,군단,사단에 이르기까지 검열그루빠가 파견되어 2개월 동안 군을 샅샅이 훑었다. 검열 결과 수뇌부가 별장과 농장을 지어 방탕한 생활을 것이 드러났고, 특수훈련을 이유로 도당,군 인민위원회 등의 사무소를 습격한 사실, 자기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다고 강등시키거나 고문,구타를 감행한 등이 폭로되었다. 그러나 이때는 아직 대남 작전과 관련된 ‘남조선해방과 통일작전계획’은 드러나지 않았다. 2개월에 걸친 검열사업이 끝난 이에 기초해 1968 11~12월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는 군단장,사단장들을 개별적으로 중앙당으로 소환했다. 이때는 인민군 특수정찰국의 부국장,부장,과장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들을 집중적으로 조사하는 과정에서 ‘비밀전략계획’이 수립되어 있다는 밝혀졌다.

 

계획은 1969 1 인민군 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전모가 밝혀졌다. 계획에 직접 참여했던 박경수가 사건의 전모를 폭로했던 것이다. 그에 따라 그때까지 개별적인 사건으로 이해하고 있던 청와대 기습사건, 울진.삼척사건 1967~1968 사이에 일어난 대남작전과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이 총체적인 전략 하나였음이 밝혀졌다. 동시에 남한에 파견된 무장부대들이 저지른 민간이 학살행위, 그리고 1.21사건 책임을 부하직원들에게 뒤집어씌우고 많은 관계자들을 제멋대로 처벌한 군벌주의적 살인행위 등도 밝혀졌다. 또한 이들의 행동은 오히려 남한 주민들의 반공의식만 강화시켜 놓아 대남사업을 더욱 어렵게 만든 것으로 평가되었고, 김일성의 유일적 영도와 김영주의 장악을 반대한 반당행위도 비판되었다. 김일성이 사건에 대해 이들의 죄상을 종합해 보면 김창봉,허봉학,김정태의 죄행과 당에 끼친 해독은 최창익의 8 종파보다 크다.”고 말했을 정도로 심각한 해악을 끼쳤던 것이다.

 

결국 사건을 주도한 김창봉,허봉학,김정태 등은 1969년 1월 인민군 당 전원회의에서 군벌관료주의자로 낙인찍혀 숙청되었다. 이로써 공명심과 권력욕에 사로잡혀 1967년의 무장소조 침투, 1968년의 청와대 기습사건과 울진,삼척 침투사건으로 이어지는 군부 강경파의 계획은 일단 중단되었고, 북한의 군사적 모험주의에도 제동이 걸렸다. 동시에 2 6.25라는 참극도 피할 있었다. 이는 그 후 1972년 5월 남북공동성명을 위해 남한의 이후락 정보부장이 북한을 비밀리에 방문했을 때, 김일성이 그에게 1968년의 청와대 습격사건과 관련해 공개적으로 사과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때 김일성은 “남북 사이의 오해를 풀고 화해한다는 의미에서 사과의 뜻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해달라”면서 사건은 자신이 지도하는 노동당 수뇌부의 의견과는 관계없이 군부 일각의 좌경 모험주의자들의 행동이었다고 설명하고 사과했다고 한다.

 

그러면 2 6.25 불러올 뻔한 남조선 해방과 통일전략계획 어떻게 작성되었던 것일까? 사건이 일어날 당시 북한 군부는 통치집단의 중추적 핵심이며 아성이었다. 군부는 민족보위성에서부터 집단군,군단,사단에 이르기까지 빨치산 출신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군은 정권의 어느 부분보다도 가장 강력한 김일성 수호집단이었다. 당시 군부의 핵심 가운데에는 민족보위상 김창봉, 대남국장 허봉학, 특수작전국장 김정태, 집단군 사령관 정병관, 김양춘, 유창봉 등의 강경파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들은 대남사업에서 공을 세우기 위해 남조선 해방과 통일전략계획이란 것을 작성했다.

 

그러나 계획의 실질적인 작성주체는 특수작전국장 김정태와 그의 지휘를 받던 지경호, 이재호, 박경수 등이었다. 김정태는 김일성의 둘도 없는 동지였던 김책의 둘째 아들로, 소련 군사아카데미에서 「현대군사학」을 공부한 군부 엘리트였다. 전략계획은 김정태의 지휘 아래 3인이 만든 것을 수뇌부가 최종 검토해서 확정한 것이었다. 계획을 실행하는 데는 군과 더불어 노동당 대남사업총국이 함께 나섰다. 1967 5월에 일어난 박금철,이효순 사건으로 대남사업총국장 이효순이 제거되면서 후임으로 군부 강경파의 일원이었던 인민군 총정치국장 허봉학이 옮겨왔기 때문이다. 김일성의 신임을 받고 있던 허봉학은 대남사업총국장으로 가면서 사실상 대남사업의 전권을 부여받았다. 게다가 허봉학은 자리를 옮기면서 자기 추종자들을 여럿 부부장급으로 데리고 갔다. 그렇게 해서 군부와 대남공작 부문의 합작으로 계획을 진행했던 것이다.

 

 

출처 - 확인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