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조선 역사

사도世子는 天子(황제)가 되어 天壽(천수)를 누리고 天下를 평정하다!

自主人 2021. 9. 9. 00:26

<쑈킹> 장편新作 90컷 포스팅!!   사도世子는 뒤주에서 죽지 않았다!

●정조대왕23년(1799년)에 90세의 태상황제의 국상을 치르는데 누구인가?●

부제::사도世子는 天子(황제)가 되어 天壽(천수)를 누리고 天下를 평정하다!
<정조대왕실록>으로 증명한다!
원문발췌::이양행 대조선삼한역사학회 古典조사전문위원!(감사드립니다!)

 

☆사전설명☆프롤로그!!

아래 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23년,淸가경4년條기사인데 정말로 쑈킹한 사실이 드러났다!

 

1. 사도世子는 죽지 않았고 86세까지 황제(天子)로써 엄청난 일을 하였다
너무나 일을 많이 하여 카스피해카지흐로 부터 인도, ,네팔,티벳트, 안디잔, 우즈백, 몽골, 미안마,페르가나, 베트남,신강성등을 제후국으로 再복종(충성맹세)시켰다!
정조대왕은 재임4년(만3년)만에 국상(國喪)을 치른다고 밝혔다!


2. 이업적이 영조와 정조업적으로 기록되었고 사도世子는 제위자체가 지워졌다!
조선왕조의 王은 황제라 불리웠고 天子라고도 불리웠다!
더불어 여러王도 존재했다

사도세자는 화성돈(워싱턴)의 신도시를 포함한 많은 도시를 건설한 주인공이었다
그래서 일루미나티(노론,광명회)는 사도세자를 지울 필요가 있었다
왕조실록 곡필하면서 빼버렸다!
그러나 시호를 내리는 조서에서 밝혀졌다
사도세자는 정식시호와 묘호를 받았다
高宗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의 연대는 명,청의 연호가 사실에 부합한다!

 

▲ ☆드라마 이산에서 영조와 정조☆

 

할아버지와 손자로 표현되어 있고 우리는 그렇게 교육받아 왔다!
사도세자는 뒤주에 갖혀 죽은것으로 알고 있다!!

 

▲ ☆미뉴어쳐 가짜 뒤주☆


●영조 정조의 생물연대와 업적의 의문점●

영조대왕(1694~1776)
기존의 역사에서는 영조대왕이 52년의 최장 제위기간을 자랑하면서 83세로 1776년에 붕어(崩御)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망연도가 특이하게도 일루미나티(광명회)연도인 1776년이며 이 년도는 미국조지워싱턴이 대통령으로
미국을 건국한 해이다!

☆영조(英祖)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7669

 

영조(英祖)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재위 1724∼1776. 이름은 이금(李昑), 자는 광숙(光叔), 호는 양성헌(養性軒). 숙종의 세 아들(景宗·英祖·延齡君) 중 둘째이며, 어머니는 화경숙빈(和敬淑嬪) 최씨이다. 비는 서종제(徐宗悌)의 딸 정

encykorea.aks.ac.kr

탕평책
노론세력을 억누름
도시개보수하수도 정비
가혹한 형벌중단 인권존중
신문고 부활
前반부는 당파싸움에 탕평책에 주력을 했고 後반부에는 실학과 건설에 주력을 했다!

★사도세자★(1735~1762년)

▲ 초상화(후대 그림)

 

▲ 친필

1735년출생~~1762년 27세에
뒤주에 갖혀 죽음!
추존 장종황제

★정조대왕★

☆정조(조선) - 나무위키☆

https://namu.wiki/w/%EC%A0%95%EC%A1%B0(%EC%A1%B0%EC%84%A0) 

선원보감에 실린 정조대왕의 모습↑↑↑

정조(1752~1800년) 48세에 죽음
제위=1776년~1800년 24년

정조는 24년간 제위한것으로 나타남

●시호표고문에 나타난 핵심Point●

정조는 태상황(사도세자)에게 1796년경에 양위를 받는것으로 밝혀짐
양위받은지 3년동안 황제업무를 뒤에서 태상황으로 밤낮으로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고 표현함
세도세자는 87세에 양위함(1796년경)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태상황은 1776년에 죽은 영조가 절대로 아님
정조는 자신을 붕어(사망)한 황제의 아들이라고 표현함

세도세자의 태어난 연도는 기존에 1735년이 아니고 1709년경으로 밝혀짐
정조는 양위받은지 만3년이라고 했고 그 년도가 1799년이며
본문에 제위23년은 곡필이고 淸가경4년이 맞음
그러니가 연호가경(嘉慶)은 대조선의 연호임
청(淸)은 대조선의 朝代名일수 있음
정조는 즉위5년(만4년)만에 피살당함 1800년
결국 수원화성(화성돈,워싱톤 신도시) 건설은 사도세자의 작품!

 

본문과 해설
<본문> <해설>을 번갈아 포스팅할것임




♥本文과 해설 그리고 삽화♥

정조실록 51권, 정조 23년 5월 27일 갑신 1번째기사 1799년 淸가경(嘉慶) 4년 중국(수도권)에서 시호를 반포하고 내린 조서.

<해설>
가경4년에 조선의 수도권中國에서 사도세자(편의상)의 죽음과 시호를 반포하면서 조서를 내림

[본문]
진향사 정사 구민화(具敏和)와 부사 김이익(金履翼)등이 연경(燕京)에 있으면서 치계하였다.
<해설>
구민화와 김이익은 요즘말로 청와대 대변인이다
연경(燕京)이란 유라시아대륙의 카라코럼으로 본다!

 

카라코롬==연경(燕京)
과거 연나라가 있던곳!!

몽골 카라코롬이 조선역사상 연경(燕京)이다
김연경이 아니고~~~


시호(諡號)를 반포하고 내린 조서(詔書)는 다음과 같다.

"봉천 승운 황제(奉天承運皇帝)는 조서를 내린다
<해설>
봉천승운황제는 정조대왕을 지칭함!


[本文]
예로부터 제왕은 만물을 다스리고 만민을 통솔하여, 높은 덕은 나라를 번창시키는 데에서 성대하였고 큰 계책은 왕업을 이루어 나가는 데에서 환히 빛났다. 그래서 모두 옥책에 적어 시호를 정하고 법전을 상고하여 휘호를 올렸다. 이것은 여러 사람들의 우러러 공경하는 정성을 표시하기 위함이고 선대의 광명을 이어받아 그 아름다움을 널리 드러내기 위함이다.

[本文]
삼가 생각건대, 세상을 떠난 우리 태상 황제는 총명한 자질을 하늘로부터 타고나서 몸가짐이 장엄하고 마음가짐이 경건하여 날로 수양이 성취되었다. 쉬지 않고 지극한 성실을 추구하는 근본 마음을 넉넉하게 하였고 유구하고 끝없는 도량을 넓히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해설>
1799년 세상을 떠난 태상황제를 애도하고 있다!

[本文]
경건한 마음으로 하늘의 명을 잠시도 잊지 않아 하늘을 모범삼고 하늘의 뜻에 합치되었으며, 상제를 대하여 조심스럽고 신중한 자세로 교외의 제단에서 엄숙히 제사를 올려 신령이 선택하고 하늘이 복을 내렸다. 적전에서 몸소 농사를 지어 빠뜨리지 않고 종묘에 제사를 지냈고 능을 참배하러 거둥하여 신령들께 술잔을 올렸다.

☆현재 성균관 명륜당은 미뉴어쳐건물☆
애들 소꼽장난!

명륜당 앞의 비석에 훈계의 글을 지어 새긴 것은 선조의 제도를 삼가 따른 것이고, 사실을 기록하는 역사를 써서 외운 것은 선대 황제의 계책을 정성껏 받든 것이다. 봉작을 하여 여러 황족들의 혈맥을 복구하였고 품질을 더하여 옥첩에 빛을 더하게 하였다.

원로 공신들을 예우하여 높였고 관리의 법도를 모범이 되어 바로잡았다. 복잡한 정사는 환히 알아서 비답을 내렸고 모든 벼슬을 함께 임명하여 대궐에서 접견하였다. 여덟 가지 방도로 나라를 다스리니 이익과 폐해를 두루 알았고 여섯 가지 청렴한 일로 관리들을 평가하니 권장되고 징계되어 서로 가다듬게 되었다.

<해설>
8방8책으로 스텐다드하게 나라 혹은 세상을 다스렸다!

 

[본문]
역참(驛站)에서 올라오는 보고에 밤낮으로 관심을 기울여 멀리 저 벼곡식 논밭의 일을 진념하였고, 볕나고 비오는 날씨에 대해 농부(農部)에 자문하여 그 수확 곡식의 수량을 상세히 헤아렸다.

새로 일군 밭의 조세는 다섯 번을 면제하였고, 조운선의 축난 쌀은 세 번을 덜어주었다. 해묵은 포흠을 두 번을 탕감하여 은혜를 더하였고, 누차 재해가 심한 논밭을 걱정하여 세금을 면제시켜 주었다. 예부에서 측은한 마음을 가지고 새봄에까지 백성들을 진휼하였고, 도성에 은택이 흐르고 가까운 고을의 포흠도 용서하여 주었다.

<해설>
이내용은 영조대왕의 업적과 오버렙됨
영조에게 기록상 전가됨
(영조위키 백과 참조)

독일엽서에서 나타난 조선농촌!

 

[本文]
백성들의 고통을 부지런히 돌보니 자문을 구하심이 변방 신하들에게까지 두루 미쳤고, 드넓은 도량으로 토목 공사의 어려움을 헤아리니 수리와 건축에 나라의 창고를 자주 열었다. 형법을 참작하여 죄수를 심리하고 죄가 의심스러울 때에는 오직 가벼운 쪽을 따랐으며, 군수품을 모아 군사들을 훈련시키고 군대를 출동시킬 때에는 군률로써 하였다.

대조선군 복장

 

도시(都市)를 건설하고 향읍(鄕邑)을 구획지었으며, 제도를 만들어 공적을 드러냈다. 헌장(憲章)은 오조(五朝)의 것을 받들었고, 법도는 삼대(三代)의 것보다 훌륭하였다. 으뜸가는 공로를 표창해서 술잔을 올리니 사직(社稷)의 제사가 경건하게 치루어졌고, 천지 신명과 산천에 차례로 제사를 올리니 제사 그릇들이 일정한 제도에 맞았다.

<해설>
표고문에 대규모土木공사와 도시를 많이 건설하고 향읍의 개량을 하였다
여기서 도시건설은 화성돈(워싱턴)급의 도시를 건설한것을 말함
요즘말로 새마을운동도 전개했다
정조업적과 오버랩되어 있다!

 

수원화성돈은 한반도가 아니다!
지은사람도 사도세자이다!
1796년완공
이시점이 양위하는시점이다!



[本文]
아름다운 옥에다 책문과 인장을 새기니 선대의 영광보다 더 빛났고, 그릇에 두루 그림을 새기니 고금을 참작하여 성대한 법도를 밝히는 것이었다.

종과 경쇠는 음률이 중화의 화평한 기상에 맞았고, 옥과 금으로 만든 수레는 황제 의장의 훌륭함을 볼 수 있었다. 삼통(三通)을 편찬해서 법칙을 삼으니 과오를 짓는 일이 없었고, 육전(六典)을 힘써 연구하여 책을 엮으니 기강이 정연하게 바로잡혔다. 천문(天文)을 관장하는 곳에서 도수(度數)를 헤아리고 때를 연구하게 하니 하늘의 운행으로 조짐을 점친 것이었고, 탁본을 하여 책을 증보하여 나라에 소속시키니 영토에 대한 지도의 기록을 넓힌 것이었다.

황제의 위엄의 금과옥으로 만든 수레행차

 

영토에대한 地圖의 기록을 넓힘
(최한기제작의 천하전도)

 

[本文]
글을 관찰하여 교화를 이루고, 도를 실어서 말씀을 내렸다. 지은 문장은 세 권의 책에 넘쳤고, 지은 시는 5만 수나 되었다. 서적을 편찬하고 유림에 은택을 내렸다. 선비를 가르침에는 깨끗하고[雅] 바르고[正] 맑고[淸] 참됨[眞]을 가지고 하였고, 서적032) 은 문연각(文淵閣), 문원각(文源閣), 문진각(文津閣), 문소각(文溯閣)에다 보관하였다.

<해설>
사도세자는 생전에 지은詩가 5만수!
책을 간행하여 여러 서고에 보관하였다!
이런 사도세자가 지은 엄청난 책들은 영조나 정조가 지은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어제(御製)가 붙은책들은 황제가 직접지은것이다
사도세자가~~~~

 

유명한 해동악장(海東樂章)도 사도세자가 지었다!! 1765년

[本文]
사시(四詩)의 악보를 정하니 풍(風), 아(雅), 송(頌)을 악장에 맞게 하였고, 세 나라 역사의 잘못을 바로잡으니 요(遼), 금(金), 원(元)의 국어(國語)를 번역하였다.

무영전(武英殿)에서 교감해서 판각을 하니 보배로운 글을 뽑아 인쇄한 것[聚珍版]은 새겨 펴내는 데에서 더욱 기술을 넓힌 것이었고, 천록각(天祿閣)에 서책을 거두어 보관하니 훌륭한 문장은 그 정미롭고 좋은 것들을 특별히 가려뽑은 것들이었다.

<해설>
궁중음악을 새로이 손보았다
책도 냈는데 <해동악장>등이 있다
이것도 사도세자가 한것인데 英祖가 한것으로 곡필되었다

요(遼)나라, 금(金)나라, 원(元)나라의 國語를 번역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북방나라를 조선의 범주에 넣고 토속글짜( 몽골문,알파벳등)으로 된 서책을 漢文인 조선글짜로 번역했다는 뜻이다
이런책을 소위 조선시대 백과사전 엔사이크로페디아를 만들어서 <천록각>에 보관해서 후세들이 볼수
있도록했다는 뚯이다!
무영전에서 이것들을 인쇄를 했다!

 

천록각은 漢나라시대부터 내려오는
황립도서관을 뜻하는 조선시대 명칭이다
漢나라도 朝代名으로 조선의 先代이다!

 

[本文]
궐리(闕里)에 몸소 가보았고 태학(太學)을 새로 세웠다. 경시(京試)의 정원은 흥환(興桓)에서 정하였고, 학교의 인원은 진적(鎭迪)에서 늘렸다. 사과(詞科)는 명경(明經) 시험을 다시 거행하여 숙유들을 더욱 특별히 권장하였고, 직접 합격자를 발표하는 소시(召試)를 일곱 번 열어서 준수한 선비들을 자주 흥기시켰다. 영명한 계책이 익숙히 정해졌고 우뚝한 공렬이 환히 펼쳐졌다.


<해설>
사도세가 생전에 궐리(闕理.대궐감옥)에 몸소시찰했다!
태학(太學)을 세웠다 즉 고구려때부터있었던 太學을 새로이 세웠다
이것을 유럽이 가져가 University가 되었다!
과거시험을 늘려서 인재를 등용했다

[本文]
군사에 관한 정사는 중추(中樞)에서 총괄하게 되었고 무공에 대한 성과는 큰 훈련에서 이루어졌다.
열 아홉 대의 화살을 거듭 명중시키니 성인의 무예가 널리 떨쳐졌고 三萬里가 넘도록 강토를 넓히니 천자의 위엄이 더욱 빛났다.

<해설>
남녀노소 무예로 활쏘기를 장려했다
온백성이 군인이 될수 있었다
조선의 영토가 三萬里에 이르렀다!
조선왕이 天子(진짜 황제)이다!

[本文]가장 중요한 대목!

염(冉)과 방(駹) 땅이 합병되니 두 금천(金川) 지역이 모두 우리의 강토에 소속되었고, 회준(回準)이 항복해 오니 네 개의 위랍(衛拉)이 모두 맹서를 하고 책봉을 받았다.

●대원(臺員) 의 반란을 미리 평정한 것이었고, 표락(驃樂)을 주파(朱波)에서 공물로 바치니 참으로 ●면전(緬甸)034) 까지 복속시킨 것이었다.

훈공이 높아 전쟁을 하지 않아도
●남교(南交)035) 가 머리를 조아리며 조회를 하였고, 공적이 뛰어나 전에 없는 것이었기에 ●구르카(廓嗒)036) 가 깨끗한 마음으로 와서 표문을 올렸고 토르쿠트(土爾扈特)는 귀순하였고 ●힌두스탄(痕都斯坦)은 공물을 가져왔고, ●안디잔(安集延)은 서봉우선(書奉右旋)하였고, ●카자흐(哈薩克)는 말을 가지고 서쪽 끝에서 와서 천자의 위엄을 우러러 두려운 마음으로 복종하니 일곱 가지 덕을 명심한 것이었고, 태평 시대에 풍속과 교화를 넓히니 열 가지 공적을 더욱 쌓은 것이었다. 오직 상제의 명을 따라 잊지 않아 능히 백성들에게 혜택을 보장하였고 후인을 위해 음덕을 펴서 크나큰 복록을 즐거이 누리게 하였다.

 

<해설> 조선에 再귀복된 영토소개!
위내용은 주로 유라시아 지역에
분포된 나라들이다
유라시아가 베링기아 대륙이 17세기초에
침강함에 따라 유라시아쪽은 관리가
소홀했는데 1700년대 중반부터
사도세자가 天子가 되어 유라시아의
소원했던 제후국을 직접챙기어
과거 大朝鮮의 위용을 되찾았다
왕조실록에 있는 내용을 하나하나
풀어 봅시다!!


염(冉)과 방(哤)이 하나가 되니
두金川지역이 모두 우리강토에 소속 되었다
이곳은 중앙아시아 아무다리아江과
시르다리아江의 가운데 지역인
지금의 트란스옥시아나 우즈벡지역이다
왜 金川인가는 여기에 沙金이 많이
난다!

 

염과 방의 땅 두江의 지역
트란스옥시아나 金이 많이 난다 金川

회준(回準)이 항복해오니 4개의 위랍(衛拉)이
책봉을 받고 조선天子에게 충성맹세를
하였다!
이말은~~~
회준은 回族(이슬람)을 뜻하고
4개위랍은 4개의 위그루族을 뜻한다
지금의 신장성(新疆省)지역이다

 

이때일을 조선왕조실록은 위그루族이 귀복해서 제후책봉을 받았고 충성맹세를 했다고 했는데 중국짝퉁역사책은 淸나라가 쳐들어가서 새로운 영토를 점령했다고 해서 新疆이라고 부른다
모두 조선 사도세자때 일이다!

대원의 반란을 평정하고 면전까지 복속시키다!!
대원은 大宛이다 즉 지금의 페르가나지역이고 면전은 미안마 이다!

 

페르가나 대완국

페르가나는 역사적인 포인트지역이라서 3개국이 분할점령하고 있다
우즈벡, 키르키즈, 타지크

페르가나 농업지역

조선왕조실록의 면전이 미안마이다

미안마 불탑

남교와 구르카가 귀복했다!
남교는 南교지국을 뜻하고 지금의 남베트남과 캄보디아동쪽지역이다!
구르카는 네팔을 포함한 東희말라야 지역이다
구르카 용병이 유명하다!

 

인도차이나 지역 교지국

구르카 네팔지역

토르구트와 힌두스탄
토르구트는 티벳토번지역과 토가라지역
힌두스탄은 인도북부와 파키스탄

 

주로 북인도와 캐쉬미르지역이 힌두스탄이다!!

티베트지역이 왕조실록에 토르구트지역이다!!

안디잔은 지금도 지명이 남아있다
우즈벡동쪽지역이다

우즈벡지도 東쪽이 안디잔

현지 안디잔사람들과 함께~~

안디잔시장에서 레표쉬카빵을 팔고 있다

★카자흐스탄이 조선왕조에게 귀복을하고 제후책봉을 받다!!★

카자흐와는 형제국이다

단군동전도 만든 이유가 있었다!

카자흐영토

왜 카자흐가 카레이한국을 전국민이 사랑하는가는 조선왕조 정조실록이 증명해 주고 있다!

실로 엄청난지역이 사도세자가 조선天子일때 제후국으로 편입되었다!

[本文]
물려주는 왕위를 받아 첫 터전을 닦을 때에는 조상의 업적을 계승하는 정성을 폈고, 옥새를 물려주고 심법을 전하여준 회갑 날에는 하늘에 고했던 뜻에 유감이 없었다. 새해 아침에 선위를 하여 3년이 지났으나 더욱 부지런히 정사에 대한 가르침을 주었고, 오래사시며 강녕하게 지내시니 90살이 넘었으나 신칙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해설>
선위한지 3년만에 사도세자가 1799년에 승하 하셨다! 90세까지 살았다
3년동안 태상황으로 지도편달하였다!
90이 넘기 사시는동안 신칙(身飭) 자신을 혹독하게 체칙질하는 단련을 게을리 하지 않으셨다!


[본문]
짐은 교육시켜주시는 황고의 은혜에 흡족히 젖어 궁정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참으로 기쁜 마음으로 아들이 바야흐로 장성해지기를 기다리고 계시더니, 슬프게도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 짐은 누구를 의지할까. 끝없는 슬픔 속에 애모하는 마음은 더욱 깊어지고, 온 백성들의 정성을 펴서 이에 휘호를 올리게 되었다.

<해설>
승하하신 태상황의 아들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돌아가신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자신 정조는~~~

정조는 자신을 황제호칭 짐(朕)이라고 표현하고 태상황의 아들을 강조하고 있다
과인이 아닙니다!


[본문]
삼가 여러 왕과 패륵과 대신과 문무 신하들에게 명하여 경건한 마음으로 법전을 상고하여 공손히 시호를 올리게 하니, 모든 제후들과 공경 신하들이 한결같이 합당하다고 하였다. 이에 비로소 시호를 올리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옛 전례를 삼가 준수하여 공손히 천지와 종묘 사직에 고하고, 가경(嘉慶) 4년 4월 7일에 책보(冊寶)를 받들고, 세상을 떠난 아버지 태상 황제께 존호(尊號)를 올렸다. 그 존호는 법천융운 지성선각 체원입극 부문분무 효자신성 순황제(法天隆運至誠先覺體元立極敷文奮武孝慈神聖純皇帝)이고, 묘호(廟號)는 고종(高宗)이다.

이미 공덕(功德)을 드러내어 환하게 밝혔으니, 효성을 다하여 그 은혜를 세상에 미루어 펴야 하리라."

<해설>
사도세자 태상황(太上皇)의 묘호가 고종高宗이라고 선언하였다!

【태백산사고본】 51책 51권 69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189면
【분류】
외교-야(野)

이포스팅을 읽고 땅을치는 者가 많이 있기를 바랍니다!!

★1749년 영조(이산 할아버지)의 어진과 1785년 정조(이산)의 어진을 공개합니다★
https://youtu.be/myv7SnUre6M

 

1749년 영조(이산 할아버지)의 어진과 1785년 정조(이산)의 어진을 공개합니다

뒤 알드의 『중국지 中國志』 장 바티스트 뒤 알드 | 프랑스, 1735 로마교황청의 인가를 받은 예수회 신부 장 밥티스트 뒤 알드(Jean-Baptiste Du Halde)가 1735년 당시 중국에 파견되었던 예수회 선교사

youtu.be

1785년 정조대왕의 어진은 사도세자일 가능성이 큽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습과 다름니다!

조선왕조실록은 일제 고서간행회에서 손보고 우리에게 던져준 책입니다 엣따!! 엿먹어라!!

이번포스팅은 놈들이 곡필하다가 시간에 쫏기어 실수한것을 발견한것입니다
완벽한 왜곡은 불가능하기때문에 왕조실록에는 이런 진실이 많이 있읍니다!

★한반도 수원화성돈은 미뉴어쳐이고 어딘가에 있을 華城의 위패이다!★

화홍문

장안문

▼ 진짜 영조.사도세자 정조대왕이 거쳐 했을 大朝鮮의 宮城을 짐작케하는 그림--궁중화가 육소방그림

▲ 경복궁애서의 만국조천도!